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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22. 2017

예약하지 않은 게스트하우스

비가 잠잠해지고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누웠다

  루앙프라방은 천국의 조각이 있는 곳이다. 라오스의 건기인 11월에서 2월까지가 여행하기 좋은 때라는 걸 알지만, 7월이 우기라고 하루 종일 비가 오는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으로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자정 무렵 라오스에 도착해서 근처 호텔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다음 날 아침 다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루앙프라방으로 향했다.


  비엔티엔에서부터 내리던 비는 이 비행기가 제대로 이착륙을 할 수 있는 걸까 의심이 될만큼 거세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요구르트와 초코파이를 먹기 위해 다녔던 주일학교에서 배운 주기도문을 더듬더듬 떠올려보았고, 불교철학 강의 때 발표를 위해 외웠던 불경 몇 개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생전 보지도 못한 코란의 경구는 과연 무엇이며, 예수와 붓다와 알라 중에 누가 나를 이 폭풍우 속에서 구원해줄 것인가 속으로 외치던 찰나 비행기가 덜컹이며 착륙했다.


  일본에서 지어줬다는 루앙프라방 공항은 새로 지어서 그런지 비엔티엔의 왓따이공항보다 훨씬 세련되고 쾌적했다. 수하물로 붙인 배낭을 찾아 질질 끌고 뚝뚝이를 잡아타고 루앙프라방 시내로 나왔다. 뚝뚝이는 비를 막는 비닐을 덧대어 놓았지만 형편없어 보여, 가방에서 비옷을 주섬주섬 꺼내어 입고 나서야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뚝뚝이는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로 향했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게스트하우스가 있다고 찍힌 지도에는 전혀 가른 상점이 있었고, 다른 상점에 들어가서 물어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허기라도 먼저 달랠 겸 가까운 음식점에 들어갔다. 일본가정식을 주 메뉴로 하는 가게였다. 자리에 앉으니 탁 트인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주황색의 배낭, 빗소리, 아주 낮은 음악 소리. 이제 겨우 여행을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바삭하게 구워진 돈가스가 나왔고 맥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로고가 예쁜 라오스의 대표적인 맥주, 비어라오와 얼음이 든 컵을 가져다주었다. 맥주를 한 병 비우고 한 병을 더 주문했을 때, 분홍색 우비를 입은 여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우비를 벗으며 앞머리를 정리하는데 한국여자인 것 같았다.


  라오스에 한국인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괜히 반가운 기분이었다. 그녀는 맥주를 주문했고, 꽤나 편해보이는 자세로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와 나밖에 없었다.


  - 저, 한국분이시죠?

  혹시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 네.

  그녀의 짧은 대답.


  - 여행 오셨나봐요.

  - 아뇨.

  끝이었다. 기껏 용기 내어 연락처를 물어봤는데 까인 기분이었다. 물론 외국까지 나와서 한국사람 만나고 현지식이 아닌 음식을 먹는 것도 좀 우스웠지만 그녀의 매너에 좀 기분이 상해버렸다. 심지어 게스트하우스 마저 없어 졌다. 엉망이다.


  - 저는 라오스에 살아요.

  한 병을 다 비웠을 때, 그녀가 자신의 잔을 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테이블이 낮아서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무릎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 녹음 중이었어요.

  그녀의 손끝이 테라스에 놓인 작은 녹음기를 향하고 있었다. 


  - 여기에서 일하시나봐요?

  - 일이라기보다 작업이랄까요. 오늘 오셨어요?

  - 네, 여행이요. 사실 여행보다 이런 빗소리나 들으면서 쉬고 싶어서요. 해먹에 누워서 비오는 거 보고 싶기도 하고.

  - 라오스가 휴양지는 아닌데, 빗소리 듣기는 좋아요.

  - 그러게요. 우기라 걱정해는데 좋은데요?

  - 맞아요, 저는 비 오는 날이면 꼭 녹음해요. 라오스도 한국처럼 일기예보를 너무 많이 틀려서 매일 하늘 보면서 운량을 가늠하고 비를 예측해봐요. 밤에는 녹음기를 켜놓고 잘 정도에요.

  - 그럼 음향쪽에서 무슨 일 하세요?

  - 딱히 음향이라고는 할 수가 없고요, 그쪽 연구해요. 자연소리, 백색소음, ASMR 이런 거 만들어요. 판매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 보통 전시회나 치료에 써요. 그런데 제가 빗소리만 너무 좋아해서 좀 탈이죠. 


  그녀의 목소리가 ASMR처럼 느껴졌다. 목소리 뒤로 깔리는 오후의 빗소리, 바람이 불 때면 더해지는 빗소리의 강약까지.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 한 거라곤 루앙프라방에 와서 점심을 먹은 것뿐인데 잠이 쏟아졌다.


  - 아, 근처에 괜찮은 게스트하우스 있나요?

  - 얼마나 묵으세요?

  - 삼 일이요.

  - 음, 그래요. 제 오토바이로 가요.

  - 네? 


  그녀가 우비를 입으며 말했다.


  - 제가 마신 맥주 값은 소개비에요.


  계산을 마치고 나오니 그녀가 빨간 스쿠터 앞에 서있었다. 똑같이 빨간 헬맷을 쓰고.


  - 그럼 제가 뒤에 타라고요?

  - 네, 여기 길 모르시잖아요. 


  빨간 오토바이가 강변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비와 바람을 가르는 소리, 오토바이의 엔진소리, 바퀴에 튀는 모래 소리들이 뒤섞였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엄습하는 것은 어둠뿐만 아니라 묘한 설렘이라는 사실을 그 순간 알았다.


  크고 작은 상점과 음식점들을 지나 연한 분홍색 건물에 파란 나무문을 가진 이층집 앞에 오토바이가 멈춰섰다.


  - 고마워요. 데려다줘서.

  - 뭘요.

  - 시간 괜찮으시면 내일이나 모레 밥 한 번 살게요.

  -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꽤나 무신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녀가 파란 나무문에 열쇠를 밀어넣었다. 딸칵하며 문이 열렸고, 문 안쪽에 달려있던 구리종이 딸랑이며 소리를 냈다.


  - 들어오세요. 저희 집이에요. 혼자 사니까 괜찮아요.


  처음 보는 여자의 집이라니.

  그녀는 실내화를 문 쪽으로 밀어주었다. 비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현관 앞에서 비옷을 벗어 접어들었다. 혼자 살기에는 꽤나 큰 집이었다. 거실 한 쪽에는 자전거가 두 대나 있었고, 스피커와 노트북이 테이블에 엉망으로 놓여있었다. 담배꽁초가 수북한 재떨이까지.


  - 저 그냥 게스트하우스도 괜찮은데.

  - 저도 괜찮아요. 그냥 예약하지 않은 게스트하우스라고 생각하세요. 


  이상한 사람이었다. 대화를 몇 마디나 했다고 이렇게 낯선 남자를 집에 들이는 걸까. 그리고 이렇게 큰 집에 혼자 살면 좀 위험한 거 아닌가. 


  그녀가 안내해준 방에 짐을 풀고, 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면서도 오늘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거실로 나오니 주방에서 그녀가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바게트를 길게 갈라 샌드위치를 만들고, 버터를 발라 후라이팬에 약하게 구워냈다. 달콤하고 고소한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 라오스 어때요?


  그녀가 패션후르츠를 반으로 자르며 물었다. 그녀의 칼질이 한 번씩 더해질 때마다 상큼한 향이 톡톡 튀어올랐다.


  - 아직 제대로 본 게 없어서요. 어젯밤에 오자마다 호텔갔다가 오늘 아침에 루앙프라방 왔거든요.

  - 아마 마음에 쏙 들지도, 다음에 다시 와야지 하는 생각도 들지 않을 거예요. 다만, 돌아가서 비 오는 날이면, 고즈넉하게 빗소리 듣던 오늘 오후가 생각날 거예요.


  그녀가 바게트와 파인애플 쉐이크, 패션후르츠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창문을 열어놓고 섹스를 했다. 빗소리의 강약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방은 2층이었고, 창 너머로 보이는 모든 집의 창문은 닫혀있었지만 누군가 우리를 엿볼 것 같았다. 하지만 손으로 쥐면 흘러넘치는 그녀의 가슴과 두 손으로 꽉 쥐고 싶은 잘록한 허리, 조금만 움직여도 나를 금세 딱딱하게 만들어버리는 엉덩이에 나는 속으로 내심 누가 우릴 지켜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몇 번이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밤이었다.


  비가 잠잠해지고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누웠다. 그녀가 내 왼쪽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어와 천천히 젖꼭지를 핥기 시작했고 나는 다시 단단해졌다. 그녀의 입술이 젖꼭지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왔다. 그녀는 라오스 기념품 대신 가지고 가고 싶을 정도로 관능적인 펠라티오를 하는 혀를 가지고 있다.


  - 한국에 언제 가요?

  - 아마도 내년 가을쯤?

  - 멀었네요.

  - 네가 한국 돌아가서 복학해도 그때 아직 졸업 안 했을 때면서, 뭐. 그때쯤이면 제대한 군인 티나 좀 벗었으려나.


  그녀가 픽-하고 웃었다. 머리가 빨리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커닐링구스를 할 때 그녀는 내 머리를 잡았는데, 머리카락이 짧은 걸 못내 아쉬워했다. 민머리가 아니라 머리카락을 잡고 싶어,라며.


  - 오면 우리 만날래요?

  - 아니. 넌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날 잊을 거야. 가끔 술자리에서나 떠올릴걸?

  - 그렇지 않아요.

  - 내년이면 난 서른두 살이야. 넌 아마 나보다 열 살쯤은 어린 여자애랑 연애하고 있겠지.

  - 아냐, 지금 너무 좋은데요.

  - 내가 좋은 게 아니라 섹스가 좋은 건 아니고?

  - 잘 모르겠어요.

  - 쓸데없이 솔직하구나, 너. 

  - 루앙프라방에 오면서 생각했어요. 비행기가 추락할 것처럼 비가 퍼부었거든요. 예수, 붓다, 알라 중 누가 날 구원할까. 그런데 아무래도 날 구원한 건 당신 같아요.


  그녀가 웃었다. 다시 빗소리가 굵어지고 있었다. 바람에 날린 빗방울 몇 개가 그녀와 나의 맨살 위로 떨어졌다.


  - 우린 그 누구의 구세주도 될 수 없어. 하지만 너에게 천국을 보여줄 수는 있지.


  그 밤, 그녀의 빨간 입 속에서 구원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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