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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23. 2017

무릇: 대체로 헤아려 생각하건대

너의 어깨 너머로 내리기 시작하던 소낙비의 속도와 무게를 기억한다

  무릇[무륻]

  [부사] 대체로 헤아려 생각하건대.


  나는 너를 떠올릴 때 ‘무릇’이라는 단어가 너와 아주 잘 어울린다고 여긴다. 너의 그 작은 허밍이 만드는 운율감이나 새벽이면 뒤척이는 네가 만드는 작은 풍경과 닮아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너를 둘러싼 어떠한 풍경이 뒤로 물러나고 오로지 너만 있는 어떠한 장면을 떠올릴 때 그 단어는 비로소 완성된다. 너는 물끄러미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다.


  설렘이나 아련함 등의 이미지가 연상되는 사랑을 해왔다. 그동안의 사랑은 거의 그랬다. 하지만 진부하거나 무료하지 않았던 것은 각각의 색채가 저마다의 오묘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를 향한 이 감정을 나는 무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내가 사랑이라고 부르며, 사랑이라 믿어왔고, 사랑해왔던 모든 것과 너는 아주 미묘하게 어긋나있다.


  우리 사이에는 유격이 존재해왔고 굳이 그것을 빈틈없이 채우거나 막으려 애쓰지 않았다. 너를 만나기 이전의 나는 감정과 육체 사이에 생기는 어떠한 공간도 허락하고 싶지 않아 끊임없이 사랑한다 고백했고, 시도 때도 없이 서로의 몸을 강하게 결합하였다. 무의식 속에서 그것이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라 믿어왔던 것 같다. 하지만 너는 굳이 그 사이를 채우지 않았다. 그 곳으로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고, 때로는 빛이 쏟아졌으며, 폭풍우가 불기도 했다. 이따금 너는 모닥불을 피우기도 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맞는지 너에게 끊임없이 물었고, 이 연애의 영원성에 대해 다른 연인들처럼 쓸쓸하게 고민하는 밤들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나의 새벽은 청량감을 만들어냈고, 보슬비라도 내리는 달이면 빗방울의 선율이 아득하게 감정의 허기를 채웠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냥 너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 같다. 그것이 너무나 생경하여 해질녘이면 가만히 너와 손을 꽉잡고 서로의 온도를 느끼는 것만으로 아주 충분한 연애였다.


  그래서 너의 부재는 나에게 너무나 생경한 것이 되었다. 앞으로 하게 될 사랑에 대한 체념도 아니었고, 곁에 없는 너를 향한 맹목적인 그리움도 아니었다. 화양연화의 순간이 나를 관통해버렸기에 나는 절정이 지나버린 날들만 남아버린 기분이었다.


  계절에 따라 점멸하듯 사라지는 별들의 몽환적인 움직임 아래, 너의 다홍빛 입술이 


- 그냥, 안녕.


이라고 말하던 밤. 너의 어깨 너머로 내리기 시작하던 소낙비의 속도와 무게를 기억한다. 이 독백이 끝나면 너는 필연인양 나에게서 더 먼 곳에 가 있겠지. 나는 영원이라는 단어가 사랑을 수식할 수 없다는 쓸쓸한 사실을 너를 통해 알았지만 우리를 압도해오던 황홀한 하루들이 오래 동경할 순간이 되리라 믿는다.


  그러니 부디, 다시 내가 나를 잊고 너를 사랑하게 만들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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