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Apr 03. 2017

아주 긴 침묵 끝에서 우리는

뭔가 의미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그러니까 사실 그건 그가 앉은 테이블 뒤쪽에 걸린 그림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를 주시하다가도 자꾸만 그의 뒤에 걸린 그림에 눈이 갔다. 그 그림은 굉장히 커서 카페의 왼쪽 벽에서 오른쪽 벽까지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웨이트리스는 처음에 그녀에게 커피를 리필해주느냐고 물었고, 그녀가 잔을 세 번째 비웠을 때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잔에 커피를 채워주었다. 투명한 유리잔에는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그를 물끄러미 본 끝에는 벌컥이며 커피를 마셨으니까.


  - 오늘 잠 못 주무시겠어요. 벌써 네 잔 째에요.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마시고 있던 것이 커피라는 사실을 알았다. 평소에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데, 그 이유는 밤에 심장이 두근거려 잠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늘 그를 따라 얼떨결에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이렇게 많이 마실 줄은 몰랐다. 


  - 저 그림이 자꾸 신경 쓰여서요. 뭔가 의미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그녀의 말에 그는 몸을 돌려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하얀 광목천에 콩테로 그렸는데 남자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그림이었다. 아이가 장난치듯 선을 죽죽 그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왼쪽 상단과 오른쪽 하단의 선이 묘하게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지만 그는 차마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그녀가 꽤 마음에 들었고, 그녀가 신경 쓰인다는 그 그림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무의식적인 자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 참 독특한 그림이네요. 선 하나 하나가 묘하게 다른 것 같으면서도 닮은 느낌이에요.


  그는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이 카페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쓰인다는 그녀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덕지덕지 남아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제멋대로 그려진 선들이 하나로 이어져 거대한 면을 만들고 다시 차원을 만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누군가도 그녀처럼 느끼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했고, 평소 미술전시회를 자주 보러 다녔고, 회화작품을 보기 위해 유럽여행을 꼬박 3개월이나 한 그녀였지만 이런 경험을 처음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커피 때문인지, 그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우리 그만 나갈까요? 계속 신경쓰이네요, 저 그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급하게 가방을 챙겨 일어났고, 그는 계산을 하며 직원에게 물었다. 그 그림에 대해.


  - 유명한 화가의 작품인가요? 저 그림?


  직원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카페 사장님 손녀가 그린 그림이에요. 집 벽에 낙서를 하도 많이 해서 결국 큰 캔버스를 주니 저렇게 선만 죽죽 그어놨대요.


  그는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과 그 사이에 이상한 침묵에 놓여있는 기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들이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