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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Oct 23. 2017

한여름의 소나기 같은

소나기가 아니라면 어쩌면 내일도 어느 같은 곳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 혹은 그 누군가가 자리한 풍경을 떠올리면 ‘어쩌면’이라는 말을 생각하곤 했다. 그것은 나의 내밀한 어떤 곳에 놓여있어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거의 분명했다. 그래서 ‘어쩌면’이라는 말을 내뱉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노력했다. 사실 그것의 결말은 그때부터 정해져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올해의 휴가는 딱 일주일. 팀원들과 일정을 조정하다보니 나는 초여름으로 날짜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함께 대만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던 친구가 일정이 생기는 바람에 혼자 대만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대만에서의 삼 일째가 되던 날 알았다. 삼 일 동안, 한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았다. 크고 낮은 건물들 사이로 차들이 흐르듯 움직였고 불쑥 외롭다는 생각이 든 찰나, 여행을 함께 오지 못해 미안했는지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금 대만 여행 중인 사람들 SNS 채팅방 링크야. 한 번 들어가봐. 일정 맞으면 누군가와 같이 다녀도 좋지 않을까?”


  선명한 파란색의 링크를 눌렀다.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채팅방이었다. 이미 대만으로 여행을 온 사람도 있었고, 며칠 내에 여행을 올 사람도 있었다. 누구나 대화가 가능했지만, 서로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여행 일자와 애칭이 이름 대신 자리하고 있었고, 프로필 사진을 눌러도 개인 정보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여행이 끝난 몇 명이 채팅방을 나갔고, 여행을 앞 둔 몇 명이 더 들어왔다. 내일 단수이에 같이 갈 사람을 찾기도 했고, 오늘 다녀온 발리 일몰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리고 불쑥 한 사람이 말했다.


  “저 지금 시먼역이에요. 오늘 비가 와서 미라이 관람차를 못 타는 바람에 저녁 일정이 없네요. 혹시 근처에 계신 분, 술 한 잔 할까요?”


  온라인 게임이나 온라인 카페 등에서 알게 된 사람과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특정한 관심사로 이야기를 나누다 만나는 일은 내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에 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저요.”

라는 두 글자를.


  우리는 30분 뒤에 시먼역에서 만나자는 대화를 나누었고, 아직 대만에 오지 않은 사람들과 지금 다른 일정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부러움과 장난 섞인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시먼역에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거짓말처럼 한눈에 그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얼굴을 본 적이 없었지만,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분명한 그였다. 


  내 인사에 환한 미소를 보내던 그 순간이, 서로의 잔이 비는 것이 무섭게 술을 따라주며 웃던 순간이 영원 같았다. 그동안 다녀온 타이베이 101타워의 전망대, 중국풍의 정원인 임가화원,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용산사, 대만 초대총통인 장제스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중정기념당까지 일정이 같았다. 


  그는 우리가 그 모든 곳에 같은 시간에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고 했다. 특별한 순간이라던가 경이로운 경험이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불확실한 감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내일도 만날 수 있을까요?”


  그의 눈빛에 잠시 망설임이 어렸다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건 한여름의 소나기 같은 거예요. 아주 국지적이고 짧은 순간이죠. 소나기가 아니라면 어쩌면 내일도 어느 같은 곳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나는 당분간은 그의 마지막 말을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 어쩌면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금방 지나갈 지도 모를 사람과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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