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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Oct 24. 2017

태풍이 지나가면

신기하죠? 기준이 없을 것 같은 모든 것에 이미 기준이 있다는 사실이

  만약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그는 생각할 것이다. 사실은 모든 것이 운명이나 우연 같은 것이 아니라 여름이면 지나가는 태풍처럼 지나간 거라고. 그리고 그것이 태풍이었을 뿐이라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며칠 전 김포공항에서였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눈이 갔다. 여행을 꽤나 많이 다녔는지 그녀의 분홍색 캐리어에는 스티커가 잔뜩 붙어있었고, 무엇보다 짧은 반바지 차림에 낡은 보라색 조리를 신고 있었다. 발등이 햇볕에 그을려 샌들 자국이 나있었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오늘 제주공항에서 그는 한쪽 바퀴가 고장 난 캐리어를 끌고 가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녀는 캐리어를 수하물로 붙이지 않고 보딩패스만 받아 유유히 그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는 어깨에 멘 배낭이 꽤나 무거워 수하물로 붙여버린 것을 조금 후회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검색대를 지나 캐리어를 끌고 가는 그녀를 쉽게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녀의 빠른 걸음에 맞춰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쫓았다. 사실 그녀보다 20cm는 큰 키이기에 아주 근소한 차이로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녀가 왼쪽 어깨에 멘 카메라 가방을 오른쪽 어깨로 고쳐 멜 때면 그는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젖은 활주로 위로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태풍의 진로는 예상대로였지만 아직까지 결항 소식이 없어 안심했던 마음이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비는 점점 강하게 내렸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는 커져갔다.


  그녀는 게이트 근처의 의자에 앉으며, 콘센트를 찾아 휴대폰을 밀어 넣었다. 어차피 같은 비행기니까 가까이에 앉아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마음과 혹시나 체크인할 때부터 주변을 서성이는 자신을 눈치채버린 건 아닐까 하는 염려가 그의 마음을 잠식해왔다.


  결국, 그가 낸 용기는 그녀와 몇 자리를 띄우고 같은 의자에 앉은 거로 끝이 났다. 의자의 왼쪽 끝에는 그녀가, 오른쪽 끝에는 그가 앉았다. 그녀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창밖을 보는 것을 반복했다. 남자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그녀의 옆모습을 힐끔 보았다. 보딩타임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이륙할 수 있을까 싶은 하늘이었다. 게이트 옆의 안내판에는 ‘지연’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했다. 날씨 앱의 새로고침만 누르는 그에게 불쑥 말은 건 사람은 놀랍게도 그녀였다.

 

  “이러다가 오늘 결항되겠는데요?”


  그가 새로고침을 누르던 검지로 서둘러 종료 버튼을 누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면에서 똑바로 본 그녀의 왼쪽 눈가에 아주 작은 점 하나가 보였다.


  “네, 그러게요. 김포에도 비가 내린다고 하네요. 아, 도착지 날씨가 안 좋아도 결항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어제 뉴스에서 보았던, 날씨와 항공기 결항의 연관성에 대해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것을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제주공항에서 항공기 결항 1순위가 태풍이라고 하니 좀 걱정되네요.”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말을 이었다. 태풍이 지역에 따라 태풍, 사이클론, 허리케인 등으로 다르게 불린다는 이야기에서부터 태풍이 육지에 상륙하면 수증기 공급을 받지 못하게 되어 점점 약해진다는 이야기까지.


  “신기하죠? 기준이 없을 것 같은 모든 것에 이미 기준이 있다는 사실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에 지연이 탑승으로 바뀌었고, 그녀는 작게


  “비행기 지연도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네요.”

라며 일어났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는다거나 하는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고 탁탁 소리를 내며 멀어진 그녀의 조리소리와 덜컹이는 캐리어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제야 그는 뉴스 말미에 기자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태풍이 이동하고 있을 때, 태풍의 바람방향과 이동방향이 비슷한 오른쪽 바람은 강해지고 왼쪽 바람은 약해진다는 마지막 멘트가. 그는 자신이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앉았더라면 그녀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오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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