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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Oct 25. 2017

봄에 닿는 순간

사랑이 시작되면, 그 사랑의 온도에 따라 계절이 변한다

  사랑에 빠지던 그 봄을 여전히 나는 잊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짐작하는 어느 순간까지 잊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말로 단언하고 싶지 않고, 기필코 변치 않을 것이라는 약속도 하지 못하지만, 더없이 사랑스러웠던 그날의 온도와 공기, 바람, 꽃잎 그리고 그 한복판에 서서 나를 흔들었던 그 봄의 너를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벚꽃에 이어 겹벚꽃까지 만발한 아주 먼 이 봄날까지 여전히.


  정말 온전한 봄이었다. 4월이었으나 나에게 그 봄이라는 계절이 청춘의 봄으로 다가온 것은 기상학적으로 3월에서 5월이기 때문도 아니었고, 아지랑이나 이동성고기압, 황사와 미세먼지라는 단어들이 자리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서쪽으로 기우는 은하수 때문에 겨울의 별자리에 비해 밝지도 다양하지도 않은 별자리를 가진 하늘이었지만 아르크투르스와 스피카 그리고 북두칠성이 만들어내는 봄의 대곡선을 볼 수 있는 날이 계속되었다. 아직 쇠지 않은 봄채소의 어린 맛은 입안에 새로운 계절을 불러왔다. 그리고 벚꽃의 개화 소식을 접했다.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다 무료해진 나는 아주 무심하게 너에게 말했다. 


   “다음 주면 벚꽃 핀대. 만개래.”


  네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네 어깨너머의 창밖으로는 거짓말처럼 벚꽃이 봉우리를 맺고 있었다. 매일 도서관에 왔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너에게 드리워진 벚나무의 그림자에 나는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대충 본 기사의 내용을 엉망으로 전달한 것에 불과했지만.


  “여의도 윤중로에 관측목이 있는데 수목관리번호 118번에서 120번 나무가 관측목이래. 이 나무 한 가지에서 세 송이 이상 꽃이 피면 그걸 개화라고 한대. 그리고 벚꽃은 개화하고 일주일이면 만발한대.”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너의 대답은, 그래 어쩌면 너의 그 말에서부터 나는 나의 미래를 내 사랑의 방향을 가늠해보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너의 그 한 마디로 나의 봄이 달라졌으니.


  “다음 주에 같이 벚꽃 보러 갈래? 윤중로에.”


  너의 물음에 떨림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기분이 이상했다. 대화란 아무도 모르는 관계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무방비한 상태에서 행해질 때, 자신이 보지 못했던 자신의 민낯을 보여주고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나는 무심한 척 짐짓 표정을 감추며 물었다.


  “벚꽃은 무슨. 중간고사 공부는 어떻게 하려고?”


  내 말에 너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의 네 성격대로라면 너는 시험보다 중요한 것이 청춘이라거나 계절의 낭만도 모르는 무심한 사람이라며 장난스럽게 나를 타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냥, 그냥 해본 말이었어.”


  너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책에 시선을 두었다. 너의 마르고 작은 등에 벚나무 그림자가 어리었고 나는 차마 계속 볼 수 없어 책을 덮었다. 


  “지금 가자.”


  네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랑이 시작되면, 그 사랑의 온도에 따라 계절이 변한다. 여름이 되었다가 겨울이 되기도 한다. 더 뜨거워지면 온통 여름이기도 했다가 이따금 비를 몰고 와서 그 온도를 순식간에 내려버리기도 한다. 그날, 너와 아직 벚꽃이 피지 않은 윤중로를 걸었다. 한참 걷다가 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 나무인가 봐. 118번 나무야.”


  가지에는 몽우리가 있었고 이미 활짝 핀 벚꽃이 아주 드물게 있었다.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내 말에 너는 같이 찍자며 내게 팔짱을 꼈고, 그날 찍은 사진에서 너는 맑게 웃고 있었지만 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아했다. 무심하지만 상냥한 봄 같은 너를. 아무도 없는 겨울의 어느 순간에 서 있는 것 같던 나를 봄의 한가운데로 데려다주던 너를. 그리고 내 계절을 아주 긴 봄의 순간으로 만들어준 너를. 그리고 아직 벚꽃이 채 피지 않았던 그날을.


  그해, 

  너를 좋아하게 될 것이 분명한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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