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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Oct 26. 2017

산란하는 어제의 마음

감성적으로 촉촉해지기 위해 물리적으로 촉촉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취미가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카페에 가는 것. 책, 노트북 심지어 휴대폰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그저 창밖으로 보이는 다소 일그러지고 축축한 기운의 장면을 오래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주문하는 음료는 늘 바뀌었다. 카푸치노, 아메리카노, 캐러멜 라떼, 카페 모카를 마시는 날도 있었고, 진저 커피나 아포카토를 주문할 때도 있었다. 체리 스무디나 요거트 프라페, 애플 사이다를 고를 때도 있었지만 별 상관이 없었다. 그녀에게 음료는 그저 카페에 앉아있기 위한 일종의 입장권 같은 역할을 할 뿐이었다.


  사실 그녀가 그런 취미를 갖게 된 이유는 순전히 그가 몇 해 전 만나다 헤어져 이제는 이름도 가물가물한 그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헤어지자고 했을 때 그녀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단순하게 이제 그만 만나자거나 다른 사람이 생겼다거나, 권태기를 견딜 수 없다거나- 보통 연인들이 헤어질 때 하는 그런 뻔한 말이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그녀는 몇 번이나 생각했다.


  “인생은 너처럼 건조하면 안 돼. 사람이 촉촉하게 살아야지. 그렇게 정석대로 건조하게 사는 거 지겹잖아. 너와 내 연애처럼.”


  일곱 해를 더 살았다는 것은 일곱 해 만큼의 지혜가 생기는 일도, 일곱 번의 연애를 더 했다는 사실도 아니다. 그러나 그때의 그녀는 일곱 살 많은 그의 말이 어쩐지 일곱 해 뒤의 그녀가 내뱉어야할 말처럼 느껴졌고,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근엄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교우들과 사이좋게 지냈으며, 반장을 도맡아할 정도로 리더십이 강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여 갓 신입사원이 된 그녀의 삶은 그의 말대로 정석이었다. 아버지는 왜 엄했고, 어머니는 어떻게 다정했으며, 교우들과 얼마나 친밀하였나. 그의 말대로 너무 정석대로라서 무료해보이기까지 한 인생이었다. 


  그녀의 삶이 촉촉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엄마는 제비와 바람이 나서 젖먹이 동생까지 버리고 나가며, 화가 날 때마다 학교 유리창을 깨부수어 학생부에 써줄 좋은 말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런 삶을 살았어야 촉촉해지는 건가 싶어졌다. 왜냐면 그의 삶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마 정년을 앞둔 아버지에게 술을 권할 수도 없었고, 교회 권사인 어머니에게 새 아버지를 구하는 것이 어떤지 물을 수 없었다. 다만 손거울 하나를 바닥에 던져 깨트렸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동생이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괜찮은지 물었을 때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결코 촉촉하게 살 수 없겠구나.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감성적으로 촉촉해지기 위해 물리적으로 촉촉해지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비 오는 날이면 무작정 비를 맞기 시작했다. 사실 무작정 맞았다는 건 틀린 말이다. 기상청에서 발표하는 3개월 전망을 꼼꼼하게 봤고, 금요일 밤이면 동네예보를 확인하고 토요일에 비를 맞으러 나갈 시간을 정했다. 심지어 그녀가 사는 동네에 비가 오지 않으면 옆 동네나 그 옆 동네의 예보를 확인하였다. 하지만 산성비가 내려서 석조문화재 훼손이 심각하다는 기사를 접한 후에 그녀가 택한 것은 바로 비 오는 날 카페에 앉아 비를 보는 일이었다.


  금요일이었던 어제도 퇴근길에 비가 쏟아졌다. 그녀는 버스정류장에 내려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가다가 방향을 바꿔 카페로 갔다. 차가운 음료와 따뜻한 음료 중 잠시 망설이다 차가운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창밖에 잘 보이는 테이블을 찾았다. 빈자리가 꽤 있었지만 창가에 빈자리는 없었다. 그녀는 망설이다 혼자 앉아있는 남자에게 가서 말을 건넸다.


  “자리가 없어서 그러는데요, 혹시 혼자 오셨으면 같이 앉아도 될까요?”


  턱을 괴고 창밖을 보던 남자가 그녀를 올려다보곤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자신의 책을 가슴쪽으로 당겼다.


  “네, 괜찮아요.”


  남자는 비어있는 다른 테이블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녀가 커피를 다 마시는 동안에도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빈 커피 잔을 내려놓다가 이상하게도 말하고 싶어졌다. 가족도, 친구도 별 관심 갖지 않고 동호회도 없는 그녀의 취미에 대해서.


  “저는 비 오는 날 창밖을 보는 게 일종의 취미에요. 비 오는 하늘, 그 아래를 걸어가는 사람들, 젖은 거리 같은 거요.”


  괜히 말했다 싶은 찰나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맑은 날에는요? 요즘처럼 가을에는 다른 계절보다 맑고 건조해서 파란빛이 훨씬 많이 산란되어서 하늘이 엄청 파랗거든요. 대기가 건조하니까 하늘이 훨씬 더 높아보이기도 하고요.”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저녁9시까지 비 예보가 있던 것 같다. 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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