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맛있는지 알면 그런 거 신경 안 쓸 텐데
두 사람은 조찬 모임에서 오늘 만났다. 조찬 모임은 두 사람이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주최한 것으로 아침식사를 함께 하면서 자연스러운 영어공부를 하고, 직원 간 교류를 도모한다는 명목하게 만들어졌지만, 그것이 허울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조찬모임 지원자가 없자 각 부서마다 정원대비 할당 인원이 배정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자기계발을 돕는 회사로, SNS에서는 뷔페 뺨치는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회사로 포장되었다. 자기계발이 아니라 회사인력개발이었으며, 아침을 집이 아니라 회사에서 챙겨먹어야할 정도로 일찍 출근해야하는 회사라는 사실이 그 뒤에 숨어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부서원들 중 회사와 집이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억지로 조찬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는 경력입사로 들어온 첫날 서무가 내민 조찬모임 가입 서류에 얼떨결에 사인을 하는 바람에 나오게 되었다.
매일 이슈를 제안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던 원어민강사가 2주간의 휴가를 받아 호주로 떠났지만, 조찬모임은 계속 되었다. 대신 자막 없이 영화를 30분 가량 틀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녀는 처음에 2주간 그냥 빠질까 생각도 했지만 6시에 일어나는 것에 몸에 익숙해져버린 뒤였다. 남자는 애초에 빠진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다.
처음에는 론 쉐르픽 감독의 <원데이>를 보았고, 그 다음에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선라이즈>를 보았다. 그녀와 그는 우연히 계속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늘 일상적인 대화만 하다가 비포라이즈가 끝나던 날 그가 불쑥 말했다.
그 저는 좀 이해가 안돼요. 잘 안되기도 하고요,
그녀 왜요? 운명을 안 믿으세요?
그 헤어지고 나서 생각나는 게 싫어요. 그래서 시작도 잘 못해요.
그녀 음, 그래서 <비포선라이즈>가 나온 후에 <비포선셋>이 나왔죠. 헤어졌던 두 사람이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만나요. 이미 서로에겐 다른 사람이 있는 상태로요. 그리고 헤어지고 난 후, 생각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매일 생각나다가 그 다음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생각이 나게 되고 그 후에는 계절에 한 번쯤 날까말까 하죠. 그리고 훗날에는 굳이 끄집어내야 기억이 나게 되는 거죠.
그 그런데 그 사람은 날 기억도 못할지 모르잖아요. 처음부터. 우리 삶이 저 영화같은 건 아니니까요.
그녀 원래 이런저런 만남이 있는 거니까요. 다 같은 수는 없잖아요.
그 그게 싫다고요.
그녀 겁쟁이네요. 싫어서 아무것도 안 하죠?
그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겁쟁이. 저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사람이에요.
그녀 윤재씨가 아직 장맛을 못 봐서 그래요.
그녀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말했다.
그녀 얼마나 맛있는지 알면 그런 거 신경 안 쓸 텐데.
그 맛있어요?
그녀 맛있죠, 인생에 장이 빠지면 되나요? 되게 싱겁게 사셨네요.
그 그러네요, 진짜 그랬나봐요.
그녀 전 전통장 장인이 될 기세로 장을 담그며 살아왔는데요?
그 지금은요?
그녀 지금은 담가보려고요. 그 장맛 보여줄까요?
그 어떻게요?
그녀가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명함이 몇 개 꽂힌 게 보였다. 그녀는 명함 대신 포스트잇에 휴대폰 번호를 적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녀 이렇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