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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Nov 06. 2017

서성이는 마음을 담아도

나의 사랑은 너와 달랐다

  - 다치는 게 두렵다면 시작하지 않는 게 좋아.
    
  너는 나에게 말했다. 내 감정을 무참히, 내 고백을 무심히 만드는 말이었다.
    
  - 다치는 게 두렵다는 게 아니야.
    
  그리고 나는 변명처럼 대꾸했다.
  
  - 그러면 왜 망설이는데?
    
  나는 너에게, 넌 아마 느껴본 적이 없을 거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 내 말투와 뉘앙스는 애초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듯 너는 캔 맥주를 하나 더 따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 겁쟁이구나? 그런데 왜 느껴본 적이 없을 거라고 단정하는 건데?
    
  너의 물음에 나는 답이 될 만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너는 사랑이 참 쉬운 사람이었다. 너는 쉽게 사랑에 빠졌고, 남자들은 너에게 쉽게 빠졌다.
  쉽게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사랑뿐이라는 너의 신념 아닌 신념 때문이었다. 너는 스윙댄스 동호회에서 너에게 첫 스텝을 알려주었던 남자와 연애를 하면서, 천문학 포럼에서 만난 박사과정 학생과 자주 별을 보러갔다. 네가 잡지에 연재하던 칼럼을 담당하던 피디와는 해외로 여행을 떠났고, 한 달에 한두 번씩 가던 심리학연구소의 상담실장과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섹스를 했다. 너는 사랑이라고 했다. 한 시기에, 한 번에, 한 사람과 한 가지의 사랑만 하는 것이 너에겐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남자들이 너에게 쉽게 빠지는 이유는 나에게서도 찾을 수 있었다. 여럿이 있어도 눈에 띄는 외모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긋나긋한 말투와 곱게 휘어지는 반달 눈매도 그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너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에게만 집중한다는 느낌을 충분히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너의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전 생애를 살면서 너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오로지 나뿐인 것처럼 나에게 집중했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 비슷할 거다.
  그리고 너는 무모했다. 상처받거나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 가시밭길이라고, 네 발은 금방 생채기가 나서 쓰리고 아플 거라고 말해도 듣지 않았다. 그 가시덤불 너머에 있는 네 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 사랑을 향해 너는 아주 가벼운 걸음으로 그리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나의 사랑은 너와 달랐다. 나는 오래 지켜보았고 신중했다. 다음을 생각했고 그 다음의 다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받을지도 모르는 아픔과 생길 수도 있는 후회가 사랑으로 치환될 수 있을 만큼의 확신이 섰을 때가 되어서야 겁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너를 사랑한다는 확신 외에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너는 나에게 집중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만 집중한다는 뜻은 아니리라. 그것에 부딪힐 때면 나는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기분에 빠진다. 순식간에 기억이 빛을 잃고 사랑이 낡아가는 착각에 휩싸인다.
    
  - 있잖아, 사랑은 지금의 감정에 충실한 거야. 내일의 감정을 염려하느라 오늘 느낄 수 있는 사랑을 구석으로 혹독하게 몰아붙일 필요는 없잖아.
    
  입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숨죽이고 감정의 구석에 앉아있던 것들이 눈을 뜨는 것만 같았다. 그것들은 조금씩 빨리 걷기 시작해서 내 몸 곳곳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나는 불쑥 너에게 말했다.
    
  - 산책할래?
    
  너의 미소가 덜컹거리며 내 안으로 들어온다. 서성이는 마음들이 자리를 찾아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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