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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Oct 22. 2017

계절감: 겨울이 머무는 속도

함께해서 따뜻한 것과 혼자서도 춥지 않은 것은 전혀 다른 의미에요

  계절은 시간의 속도를 담아낸다. 예를 들면, 지금 창밖에 쏟아지는 눈처럼. 나는 투명한 창 너머의 눈을 바라본다. 눈이 내리는 소리라던가 떨어지는 눈송이의 간격 그리고 관통하는 바람의 리듬감이 주변을 감싼다. 시간이다. 계절에서 계절로 바뀌는 것은 당신과 나 사이에 놓여있는 거리를 채우는 보이지 않는 유속이다.


  차곡차곡 쌓이는 눈을 보며 나는 이렇게 당신을 생각한다. 어쩌면 당신이 아니라 당신과 내가 한 계절에 놓여있던 그때를 기억 낮은 곳으로 불러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당신이 나직하게 말했다.


  “크리스마스가 여름인 나라에 살고 싶어요.”


  왜냐는 나의 물음에


  “따뜻함이 필요해요, 나에겐.”

라고 답했다. 창 너머로 눈발이 휘날렸고, 곳곳에는 아직 치우지 않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던 1월 초였다. 당신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같이 있으면 충분히 따뜻하지 않나요?”


  당신이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함께해서 따뜻한 것과 혼자서도 춥지 않은 것은 전혀 다른 의미에요.”


  그리고 그해 봄이 시작되기 전 당신은 눈이 내린 적이 없는 나라로 떠났다. 떠난 것인지 달아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올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당신의 계절이 궁금해진다. 여름뿐인 곳에서 당신은 정말 춥지 않은 계절을 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리고 나는 몇 번의 계절을 건너며 당신을 사랑했다 그리워했다 원망했고 다시 긴 겨울을 지내며 눈이 모두 녹기 전 당신이 아닌 그녀, 윤을 만났다. 윤을 계절에 비유한다면 봄을 닮았다. 아주 짧지만 모두가 기다리는 그 따뜻한 봄. 그녀의 뺨은 꽃잎으로 물들인 양 복숭아 빛이었고, 작은 손가락으로 우쿨렐레를 연주할 때면 언제까지고 봄이 계속될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봄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그녀 같을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내가 당신을 잊었거나 당신이 내게서 잊힌 것은 아니었다. 함께 하는 시간은 늘 봄과 같았지만 이따금 당신이 생경한 느낌으로 불어왔다. 지금처럼.


  “아니, 그냥.”


내 대답에 윤이 조용히 내 손을 그러쥐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닿은 내 손등에 그녀의 체온이 느리게 옮겨왔다. 나는 손을 돌려 그녀의 손과 깍지를 끼었다. 


  “지금 나오는 곡 좋지?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에 나오는 눈결정의 왈츠야.”


라며 짧게 말을 이은 윤은 음악을 더 감상하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윤의 어깨너머로 펼쳐진 새하얀 도시에 눈송이들이 정말 왈츠를 추듯 내리고 있었다. 언제쯤 눈이 그칠까. 그리고 저 눈이 모두 녹으면 봄이 오는 걸까.


  언젠가 읽었던 나카야 우키치로의 『눈(雪)』이 생각났다. 일본 삿포로와 다카치다케에서 매년 눈의 결정을 촬영해 3,000여 장의 사진을 모은 그는 눈을 하늘에서 보낸 편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며칠째 하늘에서 수천 통의 편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의 발신인은 이상하게도 눈이 닿은 적 없는 땅에 살고 있는 당신인 것만 같았다. 당신의 이름만 있을 뿐 주소는 알 수 없는 그곳.


  기온이 낮은 1만 미터 상공에서 생긴 눈의 최초 상태인 빙정 그리고 그 아주 작은 결정이 제각기 다른 형태로 변하여 서로 다른 포즈로 떨어지는 이 긴 겨울, 나는 이상하게도 그 편지에 답장을 쓰고 싶어졌다. 수신인에 당신의 이름을 쓰는 것만으로 나의 편지는 크리스마스가 여름인 그곳에 닿을 수 있을까.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윤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봄 같은 그녀를 빈틈없이 안고 있으면 내 안에 부는 이 긴 겨울바람이 저 멀리로 물러나고 어디쯤엔가 꽃이 피지 않을까. 겨울이 세상에 마음대로 내려놓고 가는 것은 저 하늘 높이에 존재했던 눈이 아니라 머리 위로 지나는 길고 긴 그리움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간을 다시 돌고 돈다. 하나의 계절이 우리에게 머무는 시간은 상대적이다. 오래된 나의 겨울이 여전히 나에게 머물고 있는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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