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알잖아. 나 마지막 연애가 3년 정도 지났고, 그 흔하다는 썸도 없이 지내온 거. 암튼 오늘 소개팅 때문에. 뭐, 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소개팅도 잘 안 들어오고,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에서는 소개팅이 아니라 자꾸 선보라고 하니까 그냥 소개팅 들어온 김에 나갔거든. 너도 공감하지 않아? 나는 소개팅도 선도 아닌 선팅이라고 할 때 마다 열 받아.
암튼 대학 때, 영화 동아리 선배가 몇 달 전부터 계속 연락이 오는 거야. 처음에는 동아리 모임 때문에 연락하다가 그 다음에는 집이 근처인 거 알고 종종 봤어. 나 서울에서 자취 시작한지 반년도 안 되어서 그 선배가 집 근처에 사는지 몰랐거든. 근데 사실 대학 때부터 선배한테 좀 관심이 있었다?
근데 선배는 동아리 여자 선배랑 사귀는 중이었고, 나보다 2년 먼저 졸업했는데, 졸업한 다음에도 계속 사귄다는 얘길 들었어. 그리고 그 여자 선배가 정말 엄청 예뻤어. 실용음악과였는데, 연예인 지망생이어서 동아리에서 찍는 영화는 죄다 그 선배가 여주일 정도였거든. 영화 시나리오 엉망이고, 디지털카메라로 대충 찍고, 편집 무비메이커로 해도 그 선배만 나왔다하면 그냥 뭐- 대학생들이 만든 영화 같지가 않을 정도로 엄청나 보였을 정도였어. 연기도 꽤 잘했거든. 암튼 길거리 캐스팅도 여러 번 되었는데 기획사 왜 바로 안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어. 야, 시나리오 빨, 장비 빨, 편집 빨 다 거짓말이야. 연기력되는 예쁜 배우 하나면 완성이더라.
심지어 성격도 좋아서 남자선배들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여자 선후배들도 다 좋아했어. 나도 무지 좋아했었어, 막 미니홈피 같은 거 할 때라서 매일 가서 다이어리 보고 사진첩 보고 그랬어. 동경 같은 거?
근데 너도 알겠지만 내가 좀 내성적이라서 다른 애들처럼 막 선배선배 하면서 말 걸어본 적은 없어. 그냥 멀리서 이쁘다, 이러고 봤지. 암튼 처음에 동아리 가입할 때, 선배한테 좀 호감이 갔던 건 사실인데 애인이 그 예쁜 선배라는 사실을 알고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거든.
암튼, 졸업하고 이렇게 한참 뒤에 연락이 닿으니까 너무 신기하고 재밌는 거야. 그 예쁜 선배는 연예인으로 데뷔 했는데 잘 나가는 편은 아니더라고. 진짜 엄청 예쁘고 날씬한데 왜 티비에서는 왜 그렇게 나오는지 모르겠어. 실제 연예인들은 진짜 말도 안 되게 예쁜가봐. 풍문으로는 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하는데 대학 졸업하고 대학 동기도 안 만나는데 동아리 사람들이랑 연락할 일이 있겠어? 어쨌든 그렇게 연락이 닿은 선배랑 동네에서 가끔 밥도 먹고, 주말에는 다른 동아리 사람들 만나고 그거든.
간만에 보니까 막 20대 초반으로 돌아간 것 같고 좋더라. 내가 취업이 잘 안 되어서 사람들이랑 오랫동안 연락 끊고 지내다가 사람들 만나니까 진짜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맨날 그렇게 놀고 만나고 하다보니 진짜 이놈의 연애세포는 죽지도 않았는지 선배가 또 다시 남자로 보이기 시작하더라.
암튼 내가 출장이 좀 잦은 직업이잖아. 제주도 출장 가면 오메기떡, 통영 출장 가면 통영꿀방, 대전 출장가면 튀김소보루 등등 전국 각지의 소문난 먹을 거린 다 사다준 것 같아. 에이, 너한테도 벚꽃 빵 사다줬잖아. 기억 안 나? 그치? 기억 나지? 전주 초코파이도 몇 번 사다줬다?
근데 이게 그냥 출장 갔다왔다고 사다주는 게 아니라는 걸 본인도 알지 않아? 매번 그렇게 선물하는데, 그냥 고맙다, 잘 먹겠다는 말만하고 뭐가 없는 거야. 그래서 모른 척하는 건가 했는데 갑자기 뜬금포로 소개팅 해주겠다고 하더라. 진짜 토씨하나 안 틀리고
“내가 소개팅 해줄게. 나랑 동갑인 우리 회사 과장이야.”
라고 하는데 빡친다는 게 뭔지 깨달았어. 내가 소개팅 받으려고 오메기떡 사온 줄 아나 진짜. 암튼 눈물을 머금고 홧김에 그냥 소개팅 한다고 했어. 선배가 사진이랑 연락처 준댔는데 보고싶지도 않아서 됐다고 하고 당일에 그냥 보겠다고 해버렸다?
나 1일 1식하면서 다이어트 하고, 백화점에서 매대에 있는 것도 아닌 매장에 있는 엄청 비싼 원피스도 샀어. 진짜 속으로는 눈물이 주룩주룩 났는데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갔다가 소개팅남도 별로면 선배를 하이힐로 찍어버리려고 킬힐 신고 나갔다니까?
오늘 오후에 그 땡볕에 발 아프게 힐 신고, 카페에 갔다? 근데 또 내가 호구마냥 30분이나 일찍 도착했어. 홧김에 한 소개팅이지만 내 깊은 곳에서는 기대에 부풀었나봐. 암튼 좀 기다리니까 선배가 들어오더라. 소개팅남보다 선배가 먼저 와서 다행이라고 호들갑 떠는데 선배가
“오늘 엄청 예쁘다. 입구에서부터 너 밖에 안 보여.”
라고 하는데 떨리는 거야. 소개팅해야 하는데 주선자에게 떨리면 어쩌자는 건지, 정말. 내가 안 꾸며서 그렇지 꾸미면 예쁘다고 조잘대는데 사실 아침에 청담동에 있는 미용실도 갔다왔거든. 아. 아까 홧김에 한 소개팅이라고 한 거 취소할게.
암튼 근데 소개팅 시간이 넘었는데도 안 오는 거야. 나는 이미 커피 다 마셨고, 슬슬 배도 고프고, 선배한테 왜 안 오냐고, 전화해보라고 했는데 선배가 좀만 더 기다리라는 거야. 그 카페에 도착한지 난 벌써 한 시간이 넘었는데.
그러면서 소개팅남에 대해 말해주겠다고 해서 시큰둥한 마음으로 듣기 시작했는데. 전공은 경영학, 나이는 32살, 직업은 홍보매니저, 취미는 우쿨렐레 연주, 가족은 부모님과 남동생, 키는 178cm, 혈액형은 O형. 딱 여기까지 말했는데 그거 전부 선배랑 똑같더라? 그래서 끼리끼리 노는구나 싶어서
“뭐야, 선배랑 똑같네요. 그래서 친구인가?”
라고 했는데 돌아온 대답에 또 설렜어.
“응, 나야. 오늘 너 나랑 소개팅 하는 거야.”
그래서 이게 뭐지, 이해가 안돼, 하면서 얼떨결에 밥 먹고, 영화보고, 맥주 한 잔하고 들어와서 지금 너한테 전화한 거야. 근데 집에 데려다주면서도 사귀자는 말은 안하더라. 이거 고백한 건 아닌데 고백받은 거 맞지? 설레서 잠이 안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