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제 많이 취했어?
남자 술은 좀 깼어?
여자 아니, 전혀. 우리 짬뽕 먹으러 갈래?
남자 일요일 아침부터 짬뽕이라니.
여자 그래서 같이 안 갈 거야?
남자 내려와.
같은 오피스텔의 8층과 11층에 사는 남자와 여자는 로비에서 만났다. 남자가 입은 네이비색 반바지는 초가을을 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여자는 집에서 입고 있던 게 분명해 보이는 짧은 반바지에 캡틴 아메리카 무늬가 프린트된 맨투맨 티 차림이었다.
남자 이야, 술 마시고 얼굴만 부은 게 아니라 다리도 부은 건가?
여자 야!
여자의 말에 남자는 깜짝 놀라 밀고 있던 현관문을 놓쳤다.
남자 농담 좀 한 거 갖고 왜 그래?!
여자 부은 게 아니라 살 찐 거란 말이야. 다음에도 똑같을 거니까 놀라지 말라고.
싱글싱글 웃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남자는 자신의 입매가 올라가는 걸 눈치 채지 못한 듯 여자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남자 오늘은 오빠가 살게. 가자.
여자 공깃밥 추가해도 돼?
남자 그럼, 그럼. 두 공기 먹어.
여자 진짜지? 나 곱빼기에 공깃밥 먹을래.
남자 아이고, 해장술만 안마시면 됩니다. 이 아가씨야.
하지만 두 사람은 연태고량주를 주문했고, 여자는 자신의 잔에 고량주를 따라 깔끔하게 한 잔을 비웠다. 남자는 턱을 괴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남자와 여자는 막걸리를 마셨다. 다섯 병을 비웠을 때, 여자는 취해서가 아니라 이제 배가 부르니 집에 가자고 했다. 두 사람이 택시를 오피스텔 앞에서 세웠을 때 여자는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딱 한 캔만 하자고 했다. 남자는 막걸리와 맥주를 마시는 건 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자의 의견에 따랐다. 여자는 학부시절부터 술을 잘 마셨고, 여자의 그나마 비슷한 주량이 되는 건 남자뿐이어서 둘은 아주 긴 시간 술친구를 하게 되었다. 여자는 심지어 남자가 군대에 갔을 때, 남자의 애인보다 더 손꼽아 남자의 군대 휴가를 기다렸다. 여자가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건 남자와 함께 마실 때뿐이기 때문이다.
남자 넌 술이 그렇게 좋냐?
여자 아니야. 어제 너무 많이 마셔서 오늘 좀 달래줄 필요가 있어서 그러는 거야. 나 어제 많이 취했어?
여자는 어제 취했다. 맥주를 마시다가 소맥을 마셔야겠다며 소주와 종이컵을 사왔고, 잔뜩 취한 여자를 집에 겨우 데려다주고 나서야 남자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남자 근데 넌 그런 거 안 물어봐?
여자 어떤 거?
남자 어제 뭐 실수한 거 없어? 같은 거.
단무지를 오물오물 씹어먹던 여자가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고 남자 앞으로 내밀었다.
여자 혹시 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이거 마시고 잊어줘.
남자 기억 안 나?
여자 뭐야, 진짜 뭐 있던 거야? 나 술 마시고 실수 잘 안하는데.
남자 물어봐. 지금.
남자의 말에 여자는 망설였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진지한 말투였다.
여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짬뽕 먹으면서 할 얘기는 아닌 거지?
여자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 아니, 그냥 여기에서 하자.
여자 아니야. 그럼 내가 비참해질 수도 있잖아. 나가자.
여자가 휴대폰을 집어들고 먼저 일어났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도로는 한적했고, 도심은 조용했다. 언제나 그랬듯 공원으로 향했고, 애인과 헤어질 것 같다거나 이직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때면 늘 가던 구석의 그네에 나란히 앉았다.
여자 응, 이제 말해줘. 내가 사과해야하는 그런 일인 거야?
전에도 몇 번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여자가 출고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남자의 차에 오바이트를 했을 때, 술에 잔뜩 취해 누군가 경찰서에 데려다놓은 여자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경찰서행조차 기억을 못 했을 때, 남자를 차버린 남자의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걸쭉한 욕을 해줬을 때 등이었다.
남자 어제 내가 너한테 물어봤어. 나는 너 좋아하는데,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하냐고.
여자가 어색하게 구르던 발을 멈추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자 야, 너 비겁하다. 나 취했는데 고백한 거야?
남자 응, 근데 너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여자 고백 받은 것도 기억 안 나는데 그게 기억날 리 있니? 뭐가 그렇게 소심해, 너는? 나 먼저 갈래.
남자 내 말 더 듣고 가.
남자는 일어나는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 미안하다고 하더라. 넌 날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고. 그래서 그냥- 우리 친구로 이렇게 잘 지내자고. 어젠 내가 미안했다. 실수는 내가 한 것 같네.
남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여자 너 진짜 뻔뻔하다. 내가 언제 그랬어! 나도 너 좋아한다고 했잖아! 내가 취한 게 아니라 네가 취했었네!
남자가 벌떡 일어나 여자 앞에 섰다. 남자의 커다란 그림자가 여자 앞에 드리워졌다.
남자 근데 왜 아침부터 시치미 뚝 뗀 건데?
여자 네가 기억 못하는 것 같아서 그랬지. 몰라, 그러니까 나 지금부터 너랑 손잡고 다닐거야.
여자가 남자의 손을 꽉 잡았다. 두 사람의 어깨너머로 일요일의 긴 태양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