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제: 보케 사용법(ver. 16.07.19._1)
사진 찍다가 피사체와 사랑에 빠지기도 해요?
화면에 가득 찬 여자의 가슴 사진이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지면 다시 화면을 가득 채우는 초점이 나간 여자의 옆모습 사진.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뒤로 물러나면 전원이 꺼진 모니터, 그 모니터에 비치는 남자의 얼굴, 남자의 어깨 너머로 새침한 표정의 여자가 서있다.
여자 그런 사진 작업은 따로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들이 다 보잖아요.
난처한 표정의 남자가 의자를 돌려 여자를 마주본다. 복숭아처럼 싱그러운 느낌이다.
남자 그래서 보통 이 시간에는 예약은 받지 않죠.
남자는 입이 삐죽 튀어나온 여자가 귀여워 웃고 만다.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어깨에 멘 가방끈을 만지작거린다.
여자 아저씨, 어디로 가면 돼요?
남자 (무심하게 턱으로 왼쪽을 가리킨다) 탈의실은 저쪽. 그리고 나 아저씨 아니에요.
남자의 턱 끝을 따라 여자의 시선이 움직인다.
남자가 카메라의 뷰 파인더로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남자의 손이 천천히 렌즈를 돌리자 뭉개진 것 같던 화면이 선명하게 바뀌며 스튜디오를 보여준다. 스튜디오는 2인용 녹색소파, 곰인형, 조형 나무, 낡은 책 몇 권이 전부다. 소파 뒤의 큰 창문에는 롤 블라인드가 쳐있다.
여자(E) 그냥 다 벗고 나가요?
남자가 뒤를 돌아보면, 여자가 아까 입고 있던 흰 블라우스로 몸을 엉거주춤 가리고 서있다. 하지만 예쁜 몸매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여자의 귓불에서부터 발목까지를 빠르게 훑고 고개를 돌린다.
남자 어차피 벗고 찍을 건데 가리면 뭐해요.
여자 (뺨이 빨갛다) 진짜 아저씨야. 그래도 누드사진이라 부끄럽단 말이에요!
남자 (시큰둥하게)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저한테는 그냥 피사체니까.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블라우스를 바닥으로 던진다.
남자 (아까와 달리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소파에 누워봐요.
여자 (소파에 똑바로 누우며) 이렇게요?
남자 아뇨. 옆으로. 팔걸이에 다리를 걸치듯이 누워요.
여자의 다리가 소파의 팔걸이에 걸쳐지고, 여자는 어색한 듯 발을 흔든다. 발목의 문신이 아른거리듯 흔들린다. 남자는 줌을 당겨 여자의 발목을 찍는다. 남자가 여자 가까이로 오자 여자는 움찔한다. 손으로 가슴을 가린다. 손톱에는 아무것도 발라져있지 않다. 왼손 검지에 가느다란 은색 실반지가 끼워져있다.
남자 (줌으로 반지를 당겼다가 빼며) 반지 빼는 게 더 예쁠 것 같아. 커플링?
여자가 반지를 빼고 두리번거리다 쌓여있는 책 위에 올려놓는다.
여자 (무심하게) 아뇨. 그냥 길에서 파는 삼천 원짜리 반지에요.
카메라 뒤로 남자의 미소가 번진다. 스튜디오 가득 셔터 소리가 퍼지고, 여자는 남자의 요청에 따라 자세를 바꾸고 표정을 지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점차 자연스러워지고, 포즈도 과감해졌다. 하지만 셔터소리가 반복될수록 남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간다.
여자 (장난스럽게)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여자가 소파 등받이에 두 다리를 얹고, 긴 머리를 소파로 늘어뜨린다. 몇 가닥은 아래로 떨어진다. 헝클어진 머리와 무방비한 표정, 무릎에는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생채기가 있다. 블라인드를 통해 여과된 햇살이 여자의 얼굴에 밝게 내린다. 카메라에는 보케가 생겼다 사라진다.
남자는 아무 말 없어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셔터를 누르며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뷰파인더에는 여자의 모습이 점점 크게 들어온다. 그리고 남자는 소파 앞에 우뚝 멈춰선다. 여자가 팔을 뻗어 남자의 카메라를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당긴다. 남자가 힘없이 딸려온다.
여자 (장난기가 사라진 목소리다) 아저씨, 계속 찍어요.
남자 (애써 무언가를 억누르는) 아저씨 아니에요.
셔터 소리가 멈춘다. 남자가 뷰파인더에서 얼굴을 뗀다. 그리고 뷰파인더를 통해서가 아니라 맨눈으로 여자를 마주한다. 훨씬 더 하얗고 예쁜 그녀가 웃는다. 그 미소 위로 보케가 생겨나는 것 같다.
여자 사진 찍다가 피사체와 사랑에 빠지기도 해요?
남자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아직 그런 적은 없어요.
남자가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여자가 팔을 뻗어 남자의 목을 감싼다.
여자 아직도요?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를 하기 시작한다. 셔터를 누르던 남자의 오른손이 여자의 깊은 곳에 닿고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여자는 다리를 벌리고 남자의 긴 손가락이 여자를 깊이 애무한다. 여자의 골반 근처가 희미하게 떨린다.
여자 (입술을 떼며, 숨이 가쁜) 그만.
남자 (숨을 고른다) 왜?
여자 소리 지를 것 같아.
남자 질러도 돼. 괜찮아.
두 사람, 다시 키스를 한다. 기묘한 자세의 두 사람 위로 스튜디오 조명이 아주 밝게 쏟아져 내린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사진관 문을 밀었다가 닫힌 걸 확인하고 종종 걸음으로 멀어져간다. 그 위로 여자의 숨소리가 깔리며 F.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