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이 망가진 것은 너희의 잘못이 아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너의 이름은'을 통해서였다.
어떻게 해서 그 영화를 극장까지 가서 보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당시 자주 가던 커뮤니티에서 재미있다는 평이 자주 보였고 호기심이 생긴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 후 들렸던 거 같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지브리의 작품을 몇 개 봤을 뿐, 거의 담을 쌓고 지내던 나에게 그의 작품은 충격적이었다.
실사보다 더 생생한 작화와 사춘기 감성 가득한 OST 그리고 예상보다 완성도 높고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까지...
중학생 시절 사촌형네 놀러가서 밤새 만화책을 두근거리며 펼쳐보던, 무의식에 잠들어있던 그 감수성이 깨어나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영화는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고, 몇 년이 지난 뒤 그는 후속작 '날씨의 아이'를 공개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당시 일본 불매의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전작 대비 어두워진 이야기의 영향을 골고루 받아 큰 흥행을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혹독한 한파를 겪으며, 새삼 기후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것을 체감했고 다시 영화가 생각났다.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기 아쉬워 이렇게 철지난 뜬금없는 리뷰를 남겨본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아이들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아이들만의 세상에 살게 만든다.
호다카와 히나 이 두 명에게는 모두 부모가 없다. (호다카는 섬의 부모로부터 도망친 가출 청소년이지만 실제로 극 중에서 그의 부모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 스스로 목소리를 내거나 호다카를 통해서 추억되지도 않는다. 결국 고아나 마찬가지.)
어른의 보호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이들. 주변의 어른들은 그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그들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영화는 이렇게 10대의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10대의 감수성이란 어떤 것일까? 작은 사건에도 세상이 무너질 것 같고 작은 만남에도 인생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믿는 그리고 이 세상의 문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과잉의 감수성' 아닐까. 점점 세상으로부터의 자극에 무뎌져가다 보면 잊기 마련인 그 마음과 정서를 감독은 어디서 막 꺼내온 듯 고이 모셔와 영화에 담아낸다.
맥도널드에서의 짧은 마주침만으로도 호다카는 히나를 위해 위험을 개의치 않고 손을 내밀고 총을 꺼내기까지 한다. 더 나아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거와 다름없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서로가 세상의 전부인 시기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인생의 유일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호다카와 히나를 통해 이 아이들만의 세상은 위태로우면서도 그럴듯하게 그려지고 어느새 응원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 세상에서 제발 그들의 행복하기를...
이 영화는 전작 '너의 이름은' 보다 더 어린 소년, 소녀를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몰론 전작에서도 주인공들이 짊어져야 했던 운명은 무겁고 가혹했지만 날씨의 아이에서는 차원이 다르다.
히나는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고 호다카는 경찰에게 잡혔다가 탈주하여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고 히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총이라는 무기가 등장하고 물리적인 폭력이 동반되며 호다카는 탈주중에 철조망에 찢겨 피가 흐른다. 그들의 서사를 단순하게 낭만적이고 만화적으로 남기고 싶었다면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될 부분을 차분히 보여준다. 실제로 그 세상에서 그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담담히 보여주는 부분은 전작보다 염세적인 감독의 시선을 느낄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봐라,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다는 것,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운명을 거스른다는 건 그저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이렇게 다치고 피 흘리고 절규하고 고통받으며 나아가는 것이다. 이걸 이 아이들이 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발 나를 막지 말고 보내줘!"
전작인 '날씨의 아이'도 그렇고 이 영화에서도 아이들은 어른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절규한다.
아이들은 본인들의 진심을 의심받고 신뢰를 얻지 못하며 이것은 결국 아이들로 하여금 더 큰 짐을 지게 만든다. 전작의 미츠하와 아버지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이것은 이 상황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단순히 장치적인 기능을 넘어 (아이고 답답해 죽겠네! 애들이 좀 해달라는 대로 해줘라 쫌! 이런 마음..)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낮은 믿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결국, 세상의 변화는 어떤 용기 있는 개인의 결단과 희생이 담보되어야만 한다는 세상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호다카의 절규를 통해 읽는다.
본인들의 10대 시절을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아마도, 10대 시절이 특별했던 이유는 너무나 연약하고 세상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그만큼 나의 주변에서 유지되는 나의 작은 평화가 간절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내면으로 끊임없이 침잠하고 (호다카는 빛을 따라서 달리다가 가출을 결심한다.) 자기 주변의 작은 공동체를 전부이자 최선으로 여기며, 그 속에서 작은 평화가 유지되길 기도하는(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여린 10대 시절의 감수성. 이건 정말 오직 10대 만의 그 전유물 아닐까.
분명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희망이 너무나 손쉽게 바스러지던 경험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마치 10대 시절의 매뉴얼 혹은 해설집이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모두가 잠시 잊고 지내던 10대 시절의 그 감정 (아직 세상엔 흥미로운 만남의 가능성이 남아있어, 운명적인 누군가가 있을지도 몰라, 우리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 등등)을 다시 되살려내는 강력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것일까? 마치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연인의 향기를 우연히 맡고 그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영화로 들어가게 한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엄청난 장마와 태풍 그리고 한파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다.
만약 한 소녀를 희생해서 이 기후변화를 멈출 수 있다면?
그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모른 채 소녀의 개인적인 희생으로 이 세상을 정상으로 돌리게 된다면?
하지만 그 소녀가 세상의 전부인 한 소년이 다시 이 세상을 기후변화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 한다면?
영화는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윤리적인 질문을 넘어 이 세상의 현재 모습과 이것에 대해서 누가 책임을 져야 할지를 묻는다.
이런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게 한다.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잘못된 상태라는 것인가?
이것이 잘못된 상태라면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왜 어른들의 기준에 맞추어 세상이 이런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라는 압박감을 후대 세대인 히나가 져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저 멀리 지구 반대편의 스웨덴 소녀 툰베리의 일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지구를 망가뜨리는) 당신들은 빈말로 나의 어린 시절과 꿈을 빼앗아갔다"
마지막 타치바나 할머니의 그 대사는 현재 세대에게 보내는 위로와도 같다.
"도쿄는 원래 작은 만이었어.. 바다였지.. 이제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
할머니가 진정하고자 했던 말은 이게 아니었을까?
"우리가 그동안 쌓고 규정했던 그 기준에 맞추어 그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너네가 희생할 필요는 없어
그저 너네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맞는 세상이야, 죽지도 헤어지지도 않고 너네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
너네들이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짐들에서 자유로워지렴."
그런 의미에서 영화 도입부의 내레이션처럼 호다카와 히나는 정말 세상의 형태를 바꾸어버렸다.
이제 이 세상은 끊임없이 내리는 비로 물에 잠겼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상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