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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루 Jul 07. 2021

선 넘는 사람을 대처하는 법

이십대 후반의 내가, 이십대 중반의 내게 건네는 인간관계론

1. 선넘는 사람을 대처하는 방법을 나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인간관계 문제는 크게 두가지 원흉으로부터 생긴다. 


상대가 선을 넘었을 때와 상대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전자의 주체는 상대이고, 후자의 주체는 나이다.


2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정확히는 작년부터 거슬리는게 많아졌다.

이는 내게 인생을 통틀어 비교적 큰 이벤트였다. 갑자기 찾아온 기민함은 참 낯설었다. 또 어찌나 민첩한지 적응할 새도 없이 사람에 대한 인식까지 잠식하게 된다.

나도 모르는 순간부터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실망을 하면서 자연스레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이제 인간관계의 다른 막이 열렸음을, 그러니 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다른 문제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원인과 형세를 분해해보았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은 인간으로 인해 생긴 번민은 크게 두종류라는 것이다.


오늘은 그 첫번째인 '상대가 선을 넘어서 생기는 번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상대가 선을 넘는 두가지 원인 : 그들이 이상하거나, 내가 이상하거나


무례한 사람들을 대할 때, 의도를 가진 이들을 대할 때, 의도는 없드래도 피해를 끼치는 이들을 대할 때, 무엇보다 이들을 대할 이성적, 심리적, 체력적 준비가 안되어있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번민이 이에 해당한다.

주로 상처를 받는 경우가 이 상황으로 인해 생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갑자기 작년부터 사람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게 된 것일까?

원인은 두가지일터이다. 

먼저 내가 만나는 이들이 변화한 것일 수 있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의 상식이 나의 것과 다르거나, 지금까지 문제없던 사람이 변했을 수 있다. 


둘째로는 나의 주관에 변화가 생겼을 수 있다. 이전에는 뚜렷하지 않았던 선이 보다 선명해졌거나, 아님 보다 까다로운 위치로 이동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전에는 전혀 거슬리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그렇게 된 것일 수 있다. 


나의 경우 둘다 해당한다.






그들이 이상할 때 : 새롭거나 변했거나 



작년부터 새롭게 알게된 바운더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다지 나와 같은 세상을 사는 이들이 아니었다. 

우선 나이대가 달랐고, 근 5년간 생활해온 환경이 달랐다. 

나는 강요와 스트레스가 없는 자유의 공간에서, 무해하고 매우 상식적인 이들과 어울리며 지난 수년을 학생으로 살았다. 반면 내가 만난 이들은 말 한마디 편하게 풀기 어려운 좁디 좁은 공간에서, 높은 강도의 스트레스로 점철되어 수년간 사회인으로 살아왔다. 

당연히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사람을 대하는 온도가 다를 수 밖에.


이를 감안해도 '이런 생각을 하고, 심지어 그걸 밖으로 내뱉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순간들이 꽤 있었다.

점심을 먹으며 아무렇지 않게 특정 정치발언을 남발하는가 하면, 한참 진부해진 성편향적인 시각과 꼰대성 요구를 아무 문제의식없이 공유한다. 

이런 경우는 인터넷 짤로 돌아다니는 전설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걸 목격했을 때 참으로 기이하기 따로 없었다.

한마디로 나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이인데 변한 경우도 분명 있었다. 가장 오래된 베프 h가 지난 한해 가장 다르게 느껴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모든걸 증명한다. 그 아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연애를 시작하며 겪게된 변화들이 영향을 줬을지 모르겠다. 헌데 지금의, 아마 예전의 나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보일 때 남보다도 못한 인연이 바로 여기있다는 옛말을 체감할 수 있었다. 결국 그아이와는 연락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이상할 때 


솔직해지자면 작년부터 상대의 말이 거슬리게 된데에는 나의 선이 뚜렷하고 엄격해진, 두번째 원인에 더 큰 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몸이 안좋아 예민하다'는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예민한 때가 있긴 하겠으나 그게 그렇지 않을 때와 비교해서 어떻게 다른지 인지하지 못했다. 스트레스도 느끼지 못했고, 상황에 놓이면 커다란 저항없이 곧잘 적응했다. 그정도로 나는 둔한 사람이었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기민함은 큰 충격이었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라 자극은 더욱 컸다. 


건강악화와 그에 따른 정신적 피폐함이 나의 기민함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대학 후반부부터 함께 어울려 지내던 이들이 주로 기민하고 섬세한 편인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하면 너무 따뜻했는데 지켜야할 선이 많아 엄청 편하지만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마음은 절로 옹졸해지고 외부를 향한 벽은 견고해져갔다. 하여 예전이면 웃고 넘길 것들이 이제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옳고 그른지 인식이 겹겹이 쌓이기 시작하니 나의 손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이상 한없이 쿨할 수 없었다


좋게 생각하면 무엇이 내게 좋은건지, 어떻게 나를 지켜야하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니 장기적으로 좋은 방향일 수 있다. 아무 생각과 주관없이 '좋은게 좋은거지' 하던 시절을 흠모하면서도, 동시에 마냥 돌아가고 싶지만은 않은 이유다. 특히 남이 아무생각없는 착한 빌런일 경우, 안타깝긴한데 엮이고 싶진 않은 심리와 같다.  


인간관계 역시 그 화살을 빗겨가지 못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지켜야하는 내가 가진 선이 날이 갈 수록 진해졌고, 이런 내 성향에 확신을 갖게 될 수록 이를 넘는 이에 대한 반감이 날로 강해졌다. 

'당연히 이쯤에서 선이 있음을 알아야하는거 아니야? 나아가 선을 지키려 노력해야하는거 아니야?' 

선을 넘는 사람들은 시간이 가도 줄지 않았지만 그와 반대로 나에게 당연한 것은 날로 많아졌다. 어쩌면 나는 타의에 의해서 뿐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선택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이 선택에 대한 고민은 차후 보다 밀도있게 해보고 싶다)


무튼 여러 이유로 그렇게 나는 상대가 선을 넘는 상황을 '극혐'하게 되었다. 





상대가 선을 넘을 때 최고의 대처법 


상대가 선을 넘는 상황의 원인을 하나씩 짚어보았는데 이 과정은 의미가 있다. 원인을 손보면 문제를 해결할 단서를 얻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 상대의 바운더리가 변하는 상황은 컨트롤하지 못하니 패스. 

둘째 나의 선에 대한 인식, 즉 주관이 바뀌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어렵다.

주관은 수많은 경험과 생각이 겹겹히 쌓여 만들어지는 지층과도 같은데, 이는 나의 선택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일까?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게 바람직한 방향일까?


가능은 한 것 같은데 바람직한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오직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놓자'라는 주관만이 살아남아 마땅한 유일한 방향인거 같다는게 지금으로서의 생각이다. 언제든지 사람은 나도모르게 편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누굴 만나는지, 어떤 매체를 주로 접하는지, 요즘은 어떤 구글 알고리즘의 지배하에 있는지에 따라 영향을 받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가장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선을 넘는 이를 대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이십대후반의 내가 내린 결론은, 차단이다.

글을 이만큼이나 늘여뜨려놓고 결국 내놓는 답이 손절이라니, 참으로 쓰면서도 어처구니가 없다. 

허나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유일무이한 진리가 될 만 하다.

나를 공격하는 이를 더이상 공격하지 않게 차단하는 것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너무나도 현명한 대처임이 분명하다.


'하지말라고 하는것'이 최선의 해결책이 아닌 이유


물론 차단 전에 '고지'라는 보다 덜 극단적이고 능동적인 대처도 있다.

고지는 당신이 선을 넘고 있음을 알림으로써 상대의 행동을 교정하고 나의 권리를 지키려는 시도이다. 내가 아니라 문제를 만든 니가 바뀔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매력적이라 느껴 한 때 매우 심취한 적도 있었다.

이런 태도 또한 분명 필요하다. 오래도록 봐야하거나 공을 들여야 하는 관계일 수록 이는 참으로 중요한 미덕이 된다. 말그대로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헌데 결코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먼저 고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교정이라는 점이다.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입맛에 따라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교정말이다. 문제는 그게 본인의 입맛이 아니라는 점이다. 천륜과 인륜에 반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인간을 재단하고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없지 않은가. 특히 의도가 있는게 아닌, 그 사람의 타고난 기질과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일일 수록 더더욱 말이다. 그런 경우는 그냥 안맞는 거라고 생각한다. 

안맞는 두 사람이 만났다면 두가지 대처가 있는데, 안맞는 부분에 집중하며 죽네사네 하는게 아닌 그럼에도 같이 있을 이유에만 집중하며 만족하며 살던가. 아님 그냥 안만나는 것이다.


교정이 문제인 두 번째 이유는 힘들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생각과 행동을 교정하는 일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다. 어쩌면 그가 살아온 인생 전반의 습관을 바꾸려는 일인데, 수많은 비용이 소모되어도 성공할까 말까한 영역인게 이상하지 않다. 헌데 다른 재화는 그렇다쳐도, 교정의 과정을 인내할 우리의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마음은 결코 유한하지 않다. 특히 그 상대가 내게 그만한 가치가 없는 이라면 무엇을 아껴야할지 보다 합리적인 시각에서 금방 답을 낼 수 있을거라고 본다.


계속 봐야하는 사람일 때 대처법 


당연히 차단에 대한 반론으로 이런 이야기가 제기될 것이다. 차단을 못하는 경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맞다. 인간관계 문제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차단을 못하는 경우는 타의와 자의에 의해 두가지로 나뉜다. 먼저 공동체로 묶여서 좋으나 싫으나 계속 얼굴 부딪히며 서로를 겪어야 하는 상황이 타의에 의한 대표적 사례이다. 싫은데 좋은것도 있어서 결단을 못내리는 자의형도 가끔 보인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타의형의 경우에는 완벽한 100% 물리적 차단은 힘들지라도, 심리적 차단을 함으로써 타격감을 그나마 줄여볼 수 있다. 

가령 그 사람에게 미소는 주지만 마음은 주지 않는다거나, 온갖 방법을 사용해 피해를 당할 만한 상황을 지혜롭게 피한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 외에도 그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긍정적인 면에 집중한다거나 , 그사람의 안좋은 평판에 힘입는 방법 등도 있다.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는 것은 그가 주는 해로움을 사실상 수용하되 그가 주는 이로움을 그보다 더 크게 인식해서 상쇄하는 전략이다. 

그사람의 평판을 이용하는 것은, 대체로 내게 그렇게 까지 지독하게 해를 주는 이들은 남한테도 똑같이 그러고 있을 확률이 높아서 평판이 안좋을 확률이 농후하다. 이를 틈타 본인이 그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지혜로운 방법으로 남도 알게하여 , 심리적 위안을 얻거나 다른 차원의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힘쓰는 전략이다. 

참고로 남들이 이를 알게할 때는 대놓고 흉을 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방법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다. 평판이 좋지 않은 인물의 행실은 어딜가든 주목의 대상이기에 큰 노력없이 본인의 불이익이 알려질 확률이 크니 이를 틈타 약간의 티나지않은 노력을 곁들여 주는 정도가 가장 이상적이겠다. 


자의에 의해 차단이 어려운 경우 역시 비슷하다. 이 사람의 좋은 점 때문에, 함께 해온 수많은 시간때문에, 얘말고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차단을 못하고 이어지는 관계들이 꽤 있다. 이 때도 우리는 그의 좋은 점에 집중하는 방식을 사용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점에 집중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분명 나쁜 점은 계속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관계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딱 좋은 점 뿐이라는 인식만을 갖기로 결심하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데 보다 용이한 때가 분명 있다. 


물론 차단이 어려울 때 적용해 볼 법한 대안들이 완전하다는 건 아니다. 관계의 경중에 따라, 그리고 위치에 따라 기준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나의 경우 나와 평생 함께할 반려자에게 만큼은 가장 많고 엄격한 잣대들이 주어진다. 정말 중요한 두개가 있는데 하나가 있지만 하나가 없다면 나는 아마 차단을 하는게 맞지 않을까, 라고 지금으로선 생각하고 있다. 그 외의 관계는 그 누구보다도 쿨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인간관계에는 정답이 없다. 그저 이십대의 끝자락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마련한 단상을 화두 하나씩 빌려 써보는데 의의가 있는 글이었다. 내게 이십대 중반의, 곧 후반으로 들어설 동생이 있다면 '앞으로 최소 5년은 유의미할거라며' 이런 이야기를 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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