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쓰는 방학 일기.1

영국 촌동네 또래 친구 & 스키

by 김장혀기

1. 꿈꿨던 유학의 현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영국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 나는 유학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벅찼다.
내가 가게 될 학교는 당연히 해리포터 같은 보딩스쿨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풍스러운 성 같은 건물,
잔디밭에서 책을 읽는 학생들,
교복 대신 입고 다니는 검은색 로브,
복도를 지날 때마다 "위즐리, 이 머글 자식!" 같은 말이 들려오는 곳.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깨달았다.
내가 도착한 곳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밤 8시면 거리가 텅 비는 시골 마을.
작은 호수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조용한 곳.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집 안으로 사라졌고,
거리는 한없이 적막해졌다.

그 적막 속에서 유일하게 들리던 건,
길 한쪽에서 꾸부정하게 앉아 강아지를 안고 있던 홈리스의 목소리였다.


"Big Issue, Big Issue!"

영국에서는 노숙인들이 빅이슈(Big Issue)라는 잡지를 팔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한 손에 잡지를 든 채,
멀어져 가는 사람들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

나는 그 소리가 내겐 너무 낯설고,
어딘가 차가운 겨울의 공기처럼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버스를 타는 법도 몰랐고,
급식 줄을 서서 뭘 먹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가장 단순한 질문조차 할 줄 몰라서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서 버벅대는 유학생이 되어 있었다.


2. 그 친구와의 첫 만남

그때, 한 한국인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나와 달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영국에서 학교를 다녀서
영어를 거의 현지인처럼 했다.

말투도 자연스러웠고,
영국 사람들처럼 농담도 던졌고,
발음에서조차 어색함이 없었다.
나와 비교하면, 월등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친구는 내가 ‘유학생’ 하면 떠올리던 그 이미지 그대로였다.


✔ 항상 셔츠를 입고 다녔다.
✔ 일찍부터 헬스를 해서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 로고가 크게 박힌 루이비통 벨트를 매고 있었다.
✔ 말끔한 로퍼를 신었다.

첫인상은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처음에는 ‘나랑은 전혀 다른 애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연락을 주고받게 됐다.

어느 날, 그 내가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 학교 매점엔 신라면 작은 컵라면이 있어.”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이었는데,


친구는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날, 커피포트에 뜨거운 물을 부어
신라면 작은 컵라면을 함께 먹었다.
영국의 차갑고 낯선 공기 속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컵라면이
어쩌면 그때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한국적인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부터였다.
그 친구가 더 이상 ‘나와는 전혀 다른 애’처럼 보이지 않았다.


3. 눈 덮인 산 위에서


그 친구는 스키를 정말 잘 탔다.
빠르고 정확한 턴,
부드러운 움직임,
한눈에 봐도 오랫동안 배운 사람 같았다.

나는 스노우보드를 탔다.
기술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속도와 균형감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우리는 리프트를 타고 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고요한 설원.
뺨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

나는 보드를, 그 친구는 스키를 신고,
눈 덮인 산 위를 함께 내려왔다.

그 순간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우리는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속도로 눈밭을 가르며,
같은 겨울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온몸이 얼어붙을 듯한 바람을 맞으며 내려온 후,
리프트 옆 벤치에 앉아 작은 신라면 컵라면을 다시 먹었다.

컵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빨간 국물 위로 둥둥 떠다니는 조미유,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삼키며 서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순간.

어쩌면,


그 친구와 나는
그렇게 라면 한 컵을 사이에 두고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4. 대학을 기다리던 겨울

시간이 흘러, 우리는 대학 원서를 넣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친구가 내게 한 한국인 형을 소개해줬다.

내가 2순위로 지원했던 대학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나는 대학 생활 적응을 훨씬 쉽게 할 수 있었다.

대학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이미 그곳을 먼저 경험한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차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나는 그 친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5. 지금의 나를 만든 친구

방황하던 시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던 때.

그 친구는 언제나 곁에서 힘이 되어줬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어떻게 보면 그 친구의 영향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친구 덕분에 또래들이 할 수 있는 경험 이상을 할 수 있었다.

✔ 좋든 나쁘든,
✔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든,
✔ 돌이켜 보면 모든 경험들이 나를 만들어왔다.


"유학"이라는 이름 아래,
말도 안 통하는 시골에서 시작된 인연이,
결국 내 인생을 바꾼 중요한 연결점이 되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그때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유학생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세상은 넓지만,
또 때론 정말 좁다.


시절 인연이라는 게 그런 거겠지.




몰아쓰는 방학 일기, 한 페이지 추가.


영국 촌동네에서 시작된 인연.
스키장에서 더 가까워진 관계.
대학, 한국,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진 영향.
좋든 나쁘든, 나를 성장시킨 유학 시절의 한 조각.


눈이 내리던 스키장에서,
리프트에 앉아 바라보던 설원에서,

그렇게 시작된 한 인연이,
지금의 나를 만든 한 조각이 되었다.

그때 우리는 몰랐겠지.

그 겨울이,
언젠가 돌아보게 될 소중한 이야기가 될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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