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핀 고요함

by 건강한 오후

진주에서 열린 분재 전시회장에 느릅나무 분재가 있었다. 화분 위에서 나무는 고작 오십 센티미터였다. 화분 밖의 느릅나무는 높이 삼십 미터까지 자란다. 분재는 억지로 핀 꽃이었다. 작아져야 하는 운명이다.

나무의 밑동을 오래 바라보았다. 흙을 쥐고 있는 뿌리의 굴곡은 기괴했다. 비틀리고, 솟아오르고, 다시 흙 속으로 파고들었다. 화분 안에 가두어 둔 시간들이 만들어낸 근육이었다.

껍질은 굳고 단단했다. 그 굳은 껍질이 지난 세월의 완장이었다. 전정(剪定)의 칼날과 철사에 묶였던 억압의 시간. 나무는 모든 고통을 몸통에 새겼다. 그 상처들이 분재의 품격이라 불렸다.

나는 그 밑동의 굳은 틈을 보았다. 나무는 억압된 흙 속에서, 갈라진 껍질의 틈 사이에서 기어코 잎을 틔우고 있었다. 잎은 작고 선명했다. 그 잎들이 작아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많은 가지를 잘라내야 했을까. 분재는 생략의 미학이었다. 거대한 숲의 이야기를 작은 화분 속에 집약한 채, 가장 치열한 삶의 순간만을 남겨둔다.

내 일상에도 틈이 많았다. 녹슨 대문 틈, 건물 모서리의 균열, 출퇴근 시간 속의 십 분. 이 작은 틈들은 허술하거나 무의미해 보였다. 그러나 느릅나무 분재를 보고 알았다. 틈은 균열이 아니었다. 틈은 생명이 가장 고요하게 자신의 의지를 증명하는 경계였다.

분재의 밑동을 쥐고 있는 손은 인간의 손이다. 인간은 느릅나무를 화분에 가두었으나, 그 가둠을 통해 나무는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다. 상석과 권위를 내려놓고 빈 팔이 된 나도 그랬다. 화려한 직함과 수식어를 모두 잘라냈다. 스스로를 억압했던 완장을 벗어던졌다. 남은 것은 나이와 시간이 새겨진 울퉁불퉁한 밑동뿐이다.

느릅나무는 고요했다.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것처럼 보였다. 다만 틈을 찾아 잎을 틔울 뿐이다. 밖의 느릅나무는 바람에 크게 흔들리지만, 이 화분 속의 느릅나무는 그저 잔잔하게 흔들린다. 틈은 가장 작은 자유였고, 고요함은 가장 큰 힘이었다. 나무는 그렇게 자신을 지켜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