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의 힘』을 읽고
25년간 내 세계는 닫혀 있었다. 분기 실적, 납품 일정, 월말 결산. 그 정교하게 짜인 격자무늬 달력 안에서만 숨 쉬었고, 숫자의 움직임이 내 삶의 리듬이었다. 세상 밖에서 러시아가, 중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영역 안에서 모든 것이 통제 가능했다.
은퇴 후, 그 닫힌 세계가 부서졌다. 정해진 궤도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커피잔 옆에 펼쳐진 뉴스에, 서재의 낡은 세계지도에 허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숫자에 매달려 통제 가능한 성공을 쌓아 올리는 동안, 세상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힘, 통제 불가능한 숙명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중동에서는 총성이 멈추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수천 년 전부터 새겨진 지리라는 운명. 서재에서 먼지 쌓인 세계지도를 펼쳤다. 거대한 땅덩어리와 긴 해안선 사이, 작은 반도 하나. 한국.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늙어가고 있다. 5편에서 진주라는 '나의 지리'를 탐색했듯, 이제 더 근원적인 질문을 품는다. 이 한반도라는 공간이, 정말 내 운명까지 결정하는 걸까?
나는 팀 마샬의 『지리의 힘』에서 답을 찾기 시작했다. 저자는 단언한다. "지리는 운명이다." 그리고 그 선언 뒤에는 거부할 수 없는 역사적 증거들이 뒤따른다.
러시아의 서쪽은 끝없는 평원이다. 방어선이 없다. 나폴레옹이 왔고, 히틀러가 왔다. 그래서 러시아는 끊임없이 팽창을 강요당했고, 2022년의 침공 역시 그 숙명적인 지리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사방은 험준한 산맥과 광활한 사막, 그리고 바다로 막혀있다. 그래서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내부를 통제해야만 했다. 중동은 물이 없고 석유가 많다. 제국주의자들이 자로 그은 국경선은 부족과 종교의 경계와 어긋난다. 그래서 끊임없이 싸운다.
마샬의 논리는 명확했다. 국가도 결국 '지리'라는 출발선 위에 서 있다는 것. 5편에서 개인의 삶을 가른 '우연'을 깨달았듯, 6편에서는 국가의 전략 또한 '지리'라는 뿌리 위에 서 있음을 확인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말한 ‘밀과 옥수수’처럼, 팀 마샬이 말하는 ‘평원과 산맥’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출발선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다시 지도를 본다. 북쪽에는 중국과 러시아, 바다 건너 일본. 대륙과 해양 사이에 낀 작은 반도. 마샬은 냉정하게 말한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
역사는 그 불리함을 피로 증명했다. 이 땅은 언제나 강대국 각축의 무대였다. 학창 시절 배운 ‘완충지대’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우리는 누군가의 방패였고, 징검다리였으며, 늘 역사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남강변을 걸었다. 강 건너 진주성이 보인다. 임진왜란 때 7만 민관군이 스러진 곳. 왜 하필 진주였을까. 일본이 전라도로 가는 길목, 그 지리 때문이었다. 1967년 이 땅에서 태어났다. 분단된 나라, 휴전선이 그어진 나라, 미군이 주둔하는 나라. 나는 이 땅 위에 그저 던져졌을 뿐이다. 5편에서 "나는 진주에서 왔다"라고 썼다. 그것은 우연이었다. 이제 쓴다. "나는 한반도에 산다." 이것 또한 선택이 아니다. 이 지리적 숙명을 그저 체념해야만 하는가? 무거운 질문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책을 덮자, 다른 생각이 밀려들었다. "지리는 운명"이라는 문장이 너무 무겁게 들렸기 때문이다. 5편에서 배웠다. 조건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86학번으로 IMF 전에 취직한 것은 조건이었지만, 25년을 버틴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불리하다. 분단되었고, 전쟁을 겪었고,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했다. 1960년대에 산업화를, 1987년에는 민주화를, 2000년대에는 기술혁신을 선택했다. 조건을 인정할 때, 비로소 선택이 시작된다. 지리는 가능성을 제한하지만,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러시아의 팽창이 평원 때문만은 아니듯, 그것은 푸틴의 선택이기도 하다.
오늘도 남강을 건넌다. 이 강은 나의 지리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이 강을 건너는 방식은 내가 선택한다. 자전거를 탈 수도, 걸을 수도, 멈춰 바라볼 수도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반도라는 지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땅에서 사는 방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마샬은 "지리는 운명이다"라고 썼다. 나는 그 문장의 여백에 이렇게 새긴다. "지리는 조건일 뿐, 운명은 아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때, 비로소 어디로 갈지 선택할 수 있다.
진주에서 왔고, 한반도에 산다. 이 조건은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조건을 어떻게 살아갈지는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 속에서, 나는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