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품고도 흐르는 용기

by 건강한 오후

페달을 밟아 남강 다리에 닿았을 때, 교각에 부딪힌 물살이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걸 보았다. 물은 바위를 피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부딪혀 흩어졌다가 바위 뒤편에서 다시 모였다. 그 순간 오 년 전 회의실이 떠올랐다.


이천이십일 년 구 월, 회의실 테이블 위에 후배의 보고서가 놓였다. 나는 세 번째 페이지를 넘기다 손을 멈췄다. 수치가 틀렸다. 고객사에 이대로 제출하면 계약이 파기될 게 분명했다. 심장이 두 번 뛰었다. 한 번은 오류를 발견한 안도감으로, 두 번째는 입을 열어야 한다는 공포로.


회의실 안 여섯 명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상무였던 나는 말해야 했다. 그러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후배는 이 프로젝트로 승진 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내가 그의 오류를 지적하면 그의 평가는 곤두박질칠 것이고, 팀 내 분위기는 얼어붙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 순간 겁쟁이였다. 누군가를 구하는 것보다 나를 지키는 게 먼저였다.


"수고했습니다." 내가 건넨 말은 그것뿐이었다. 보고서를 덮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일주일 뒤 고객사에서 연락이 왔고, 후배는 사표를 냈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침묵했다. 그 침묵은 오 년 동안 내 안에 고인 물이 되었다.


은퇴 후 어느 날, 나는 셸리 리드의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을 펼쳤다. 주인공 빅토리아는 폭우 속에서 범람한 강물 한가운데 섰다. 그녀는 저항했다.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려 발버둥 쳤다. 그러나 몸은 더 깊이 가라앉았다. 숨이 차올랐다. 죽을 것 같았다.


그때 빅토리아는 팔다리의 힘을 뺐다. 물에 몸을 맡겼다.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제야 강은 그녀를 잔잔한 여울목으로 떠밀어 주었다. 책을 덮고 나는 생각했다. 물에 빠졌을 때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힘을 빼는 것이다. 발버둥 칠수록 몸은 더 깊이 가라앉는다.


나도 오 년 동안 저항했다.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강박, 사과해야 한다는 죄책감을 견디며 연락처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 저항은 나를 더 깊은 고인 물속으로 끌어당겼을 뿐이다. 오 년 동안 내 안의 물은 썩어갔다. 전화번호는 연락처에 박제되어 있었고,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소설 속 빅토리아는 상처를 지우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뭄을 견뎠고, 폭우를 통과했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도 품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고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앞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그녀를 읽으며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카야를 떠올렸다. 카야가 습지에 홀로 남아 세상과 단절하며 고립을 택했다면, 빅토리아는 모든 비극을 통과하면서도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상처를 외면하지도 않고, 그것에 갇히지도 않는 것. 그것이 흐름이었다.


한국 사회의 중년 남성들에게 직장은 정체성 그 자체였다. 이십오 년간 명함 속 직급이 나를 설명했고, 회의실의 자리가 나의 무게를 증명했다. 그러나 그 명함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투명해진다. 누구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는 '내려놓음'을 패배로 여기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물길을 따라 흐른다는 것은 포기처럼 보였고, 통제를 놓는다는 것은 무능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멈춰 섰다. 고여 있는 물처럼, 스스로 썩어가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남강을 따라 페달을 밟는 동안 교각에 부딪힌 물살을 계속 보았다. 물은 바위를 만나면 갈라진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바위 뒤편에서 다시 합쳐져 흐른다. 물은 바위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사과가 아니라 흐름이었을지 모른다. 고인 물을 퍼내는 게 아니라, 물길을 내는 것. 용서를 구하기보다 다만 네가 잘 지내길 바란다는 이 진심을, 글로 흘려보내는 것. 전화를 걸지 못하더라도 이 문장을 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금은 물길을 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 비겁했다는 고백. 용서를 구하기보다 다만 네가 잘 지내길 바란다는 이 진심이 내 안의 정체된 물길을 조금씩 열어주길 바란다.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오 년 동안 고인 물은 아직 맑지 않다. 그러나 이 문장 하나하나가 작은 물길을 낸다. 소설 속 빅토리아가 폭우 속에서 팔다리의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겼듯, 나도 이제 저항을 멈춘다. 통제를 포기한다. 그리고 흐른다.


명함을 버린 후 찾아온 고독의 자리에서 나는 이제 펜을 든다. 내 문장은 돌인가, 꽃인가. 천 년을 견디려는가, 봄마다 피어나려는가. 나는 이제 명함 대신 문장으로, 직함 대신 이야기로 나를 증명하려 한다. 내 안의 고인 물을 글로 퍼내어 새로운 물길을 내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흐름을 멈추지 않으려는 매일의 노력이다.


흐른다는 것은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안은 채로 계속 걷는 것이다. 물이 바위를 품고 흘러가듯, 나도 오 년 전의 비겁함을 품고 흐른다. 바위를 피하지 않고, 부딪히고, 흩어지고, 다시 모인다.


오늘도 나는 쓴다. 멈추지 않기 위해.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