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햇빛조차 덜 깬 시간에 나는 늘 하던 대로 우편함에서 신문 두 부를 꺼내 든다. 하나는 좌로 치우친 이야기들로 가득하고, 다른 하나는 우로 치우친 주장들로 넘쳐난다. 두 신문을 나란히 펼쳐 놓고 읽는다. 나는 판단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가리지 않으며, 다만 흐름만을 읽는다. 좌에서 우로, 다시 우에서 좌로 넘나드는 말들의 물살을 그저 바라본다. 중립이란 회색이 아니다. 그것은 양쪽의 흐름을 모두 보면서도 어느 한쪽의 물살에도 휩쓸리지 않으려는, 끝없는 틈새의 긴장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편을 가르라고 재촉하는 시대에 이 가장자리에 머문다는 것은 외롭고 위태로운 일이다.
25년간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나는 명함 속 직급으로만 세상을 보았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 두 가지 안이 올라오면, 나는 3분 만에 결론을 내렸다. 내 말은 곧 결정이었고, 내 서명은 곧 권력이었다. 나는 결단력이란 이름의 칼을 갈았고, 회사는 그 칼날이 예리할수록 더 높은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명함을 버린 뒤에야 알았다. 내 성급한 판단의 칼날 아래 누군가의 6개월이 휴지통으로 직행했고, 누군가의 생계가 베였다는 것을. 은퇴 후 만난 후배의 원망 섞인 고백을 들으며 나는 뒤늦게 참회했다. 판단은 효율인 줄 알았지, 폭력인 줄은 몰랐다. 그 공허 속에서 나는 비로소 경계 위에 섰다. 이제 판단할 권한을 잃고 다만 흐름만을 읽는 존재가 된 것은, 비겁함이 아니다. 칼날의 무게를 배운 자의 조심스러움일 뿐이다.
아침을 마치고 나면 내게 또 다른 일상이 기다린다. 자전거를 끌고 나와 남강을 따라 달리는 일이다. 페달을 밟아 강에 닿으면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친다. 이 냄새는 신문의 잉크 냄새와는 질감이 다르다. 지면의 잉크 냄새는 인쇄기에서 갓 빠져나온 건조한 공격성이다. 흑과 백, 어느 한쪽으로만 기록되어야 하는 그 냄새는 날카롭고 매정하다. 섞이지 않는 대립의 냄새다. 그러나 남강의 물비린내는 모든 잉크를 녹여내는 수용의 냄새다. 지리산 천왕봉의 흙과 진양호의 이끼가 뒤섞여 만들어낸 이 눅눅한 향기는, 좌도 우도 이 강물에 섞이면 결국 같은 생명의 냄새가 된다는 것을 매일 아침 가르쳐준다.
자전거를 타고 촉석루를 지날 때, 나는 의암 위의 논개를 떠올린다. 왜장을 품에 안고 남강으로 몸을 던진 그 순간, 그녀는 세상이 강요하는 이분법 앞에 섰다. '기생이냐, 열녀냐.' 그녀는 대답 대신 강물로 뛰어내렸다. 그 침묵이 그녀의 답이었다.
논개는 뛰어내려 시대의 이분법을 부쉈고, 나는 머물러 오늘의 이분법을 견딘다. 그녀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결단했고, 나는 좌와 우 사이에서 유보한다. 행위의 방식은 정반대일지라도,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세상이 강요하는 선택지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자리를 지켰다는 것. 논개의 침묵은 죽음으로 완성되었다. 나의 침묵은 살아서 견뎌야 하는 무게다. 명함을 벗어던진 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그녀가 섰던 그 외로운 가장자리의 진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다시 페달을 밟는다. 논개는 뛰어내림으로써 시대의 이분법을 부쉈고, 나는 머무름으로써 오늘의 이분법을 견딘다. 세상이 강요하는 선택지를 거부하고, 나는 이 가장자리에 머문다. 흐름을 읽는 것이 나의 저항이다.
내일 아침에도 나는 두 신문을 펼쳐 놓는다. 좌로 기운 글자와 우로 기운 글자 사이에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자전거에 오른다. 촉석루를 지날 때 의암 위를 올려다본다. 논개는 이미 뛰어내렸지만, 나는 아직 이 자리에 머물러 있다. 페달을 밟는다. 지면의 잉크 냄새가 남강의 물비린내에 씻겨 내려간다. 강물은 오늘도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