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 아래 천왕샘에서 물이 솟는다. 중산리 계곡과 대원사 계곡의 물줄기가 덕천 양단수에서 만나 덕천강이 되고, 경호강은 남덕유산의 물길을 받아 엄천강과 생초에서 합류한다. 이 모든 물길들이 진주 진양호에서 만나 남강이 된다. 물은 흐르며 자신을 지운다. 그러나 지우며 더 큰 이름을 얻는다.
나는 쉬고 있던 자전거를 꺼내 진양호 둘레를 따라 페달을 밟는다. 은퇴 후 삼 년 만에 산 자전거다. 집에만 있으면 시간이 정체된다.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없다. 냉장고를 열면 유통기한 지난 우유와 시든 상추가 나를 맞이한다. 혼자 먹기엔 많은 반찬들이 굳어가고 있다. 휴대폰 화면을 켠다. 부재중 전화 없음. 카톡 알림 없음.
움직여야 했다. 허벅지의 긴장감을 느끼며 바퀴를 굴린다. 느린 속도로 땅을 밟을 때, 나는 세계의 중력을 실감한다. 강은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다. 그러나 길은 되돌아온다. 호수 가를 따라 난 이 길은 마을에서 마을로 사람들을 이어왔다. 길에는 주인이 없다. 걷는 자가 주인이다.
집에서 나온 지 두 시간이 지났다. 목적 없는 페달질. 회사에 다닐 때는 모든 이동에 목적이 있었다. 약속 장소, 회의실, 출장지. 지금은 페달을 밟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아니, 목적조차 아니었다. 그냥 멈추지 않기 위해 움직이는 것. 멈추면 질문들이 몰려온다.
가을빛이 물비늘에 부서진다. 햇살이 물결 하나하나를 건드린다. 부서진 빛이 다시 태어난다. 나는 그 빛 속을 지나간다. 남사예담촌 돌담길 옆을 스쳐 지나갈 때, 담장 너머로 육백 년 묵은 감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일곱 살 소년이 어머니에게 홍시를 드리고 싶어 심었다는 나무. 나무는 제자리에서 시간을 견딘다. 뿌리를 깊이 내리고, 가지를 하늘로 뻗으며, 매년 봄을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는다. 나무는 움직일 수 없지만, 나는 움직일 수 있다—움직이지 않으면 시간이 정체되고, 멈추면 질문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웅석봉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페달을 밟다 보면 왼쪽에 단속사지(斷俗寺址)의 삼층 석탑이 보인다. '세속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뜻의 절이 있던 자리다. 천 년 전 신라의 경덕왕이 이 자리에 거대한 사찰을 세웠다. 절을 다 돌아보는 데 며칠이 걸렸다고 했다. 시간은 그 웅장한 목조 건물을 모두 집어삼켰다. 남은 것은 돌과 나무뿐이다.
자전거에서 내린다. 숨이 가쁘다. 페달을 밟는 동안은 괜찮았다. 움직이는 동안은 생각이 따라오지 못했다. 그러나 멈추는 순간 질문들이 몰려온다. 은퇴 후 삼 년.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탑과 서탑 두 기가 절터의 시간을 지키고 있다. 나는 동탑 앞으로 다가간다. 화강암으로 쌓은 탑이다. 손을 뻗어 돌을 만진다. 차갑다. 천 년의 차가움이 손바닥을 타고 명치끝까지 전해진다. 거친 화강암의 표면에는 비바람이 새긴 홈이 있다. 이 돌은 누군가의 이름을 증명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저 제 몸의 무게로 소멸의 시간을 눌러 견디고 있을 뿐이다. 내 손가락 아래 거친 질감이 묻는다. 너는 무엇을 이토록 무겁게 쥐고 있었느냐고.
절터를 걷는다. 발밑에서 기와 조각이 밟힌다. 천 년 전 이 자리에 법당이 있었고, 스님들이 염불을 외웠다. 저녁이면 종소리가 마을까지 울려 퍼졌을 것이다. 지금은 적막만이 남았다. 적막 속에서 탑만이 서 있다. 탑은 절이 사라진 뒤에도 절을 증언한다.
탑을 한 바퀴 돈다. 햇살이 화강암의 모서리를 날카롭게 비춘다. 천 년 동안 비바람을 견딘 돌의 표면은 거칠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다. 돌은 무게로 시간을 견딘다. 침묵으로 자신을 지우며 천 년을 버텼다.
나는 석탑처럼 침묵으로 시간을 견디고 싶었다. 감정을 지우고,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은퇴 후 삼 년 동안 나는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다. 먼저 연락하면 불쌍해 보일 것 같았다. 옛 동료들이 묻는 "요즘 뭐 하세요?"라는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침묵했다. 석탑처럼. 그러나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면 손가락은 떨렸다. 쓰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았다. 지우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 너무 많았다.
탑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마을 안쪽에 육백오십 년 묵은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정당매(正堂梅)다. 고려 시대 문신 강회백이 어린 시절 이곳 단속사에서 글을 읽다가 심은 나무다.
나는 매화나무 앞에 선다. 고목이다. 껍질이 거칠고 갈라져 있다. 가지는 꺾이고 속은 비었다. 이 나무는 봄이면 죽는다. 아니, 죽는 것처럼 보인다. 앙상한 가지에 잎 한 장 없다. 그러나 이월 어느 날, 고목의 껍질을 뚫고 작은 꽃망울이 터진다. 하얗고 작은 꽃잎이 바람에 흩날린다. 향기가 마을로 흘러간다.
매화는 해마다 자신을 흘려보낸다. 꽃잎을 땅에 떨어뜨리고, 향기를 바람에 맡긴다. 소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음 해 봄, 매화는 또 핀다. 소진이 곧 갱신이다. 흘려보냄으로써 돌아온다.
매화나무 앞에 섰을 때, 나는 알았다. 나는 석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침묵으로 버티는 것은 견딤이 아니라 회피였다. 매년 자신을 흘려보내고도 다시 피어나는 매화처럼, 나도 쓰고 지우고 다시 쓸 것이다. 그러나 매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흘려보냄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을 견뎌낸 뒤에도 다시 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을.
석탑과 매화나무 사이에 백 미터의 거리가 있다. 천 년 묵은 돌과 육백오십 년 묵은 나무. 그 사이를 걷는다. 돌은 무게로 견딘다. 매화는 가벼움으로 견딘다. 돌은 침묵으로 시간을 기록하고, 매화는 향기로 시간을 기록한다. 지우는 것과 흘려보내는 것. 두 가지 방식은 다르지만, 둘 다 시간을 증언하는 방법이다.
단속사의 '단속'은 세속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그러나 절터는 다시 세속으로 돌아왔다. 절이 사라진 자리에 마을이 들어섰다. 흙담이 생기고, 사람 사는 소리가 났다. 세속을 끊으려 했던 곳에서 세속이 다시 피어났다. 석탑은 마을 한가운데 서 있다. 마을 사람들은 탑 옆을 지나가고, 아이들은 탑 주변에서 논다. 탑은 '끊었음'을 증언하지만, 동시에 마을과 함께 있다. 매화나무는 마을 안쪽 담장 너머에 서서 봄마다 꽃을 피운다. 마을 사람들은 매화 향기를 맡으며 봄을 안다. 매화는 '이어짐'을 증언한다.
끊는 것과 잇는 것. 단속사는 두 가지가 대립하지 않음을 가르친다. 석탑은 단절을 견디며 세속 속에 서 있고, 매화는 세속 속에서 해마다 자신을 내어준다.
나는 은퇴 후 고독 속에 들어왔다. 회사를 떠난 뒤 시간은 느려졌다. 아침에 일어나도 갈 곳이 없다. 명함도 없고, 직함도 없다. 그 고독의 자리에서 나는 펜을 든다.
나는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바퀴가 구를 때마다 허벅지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자전거는 정직하다.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균형은 깨지고 몸은 기운다. 글쓰기도 다르지 않았다. 문장을 밀어내는 근육이 멈추면 사유는 정체되고 삶은 다시 비틀거린다. 페달을 밟는 행위와 자판을 두드리는 행위, 이 둘은 나를 지탱하는 두 개의 바퀴였다.
해가 기운다. 해 질 녘의 길을 따라 페달을 밟는다. 진양호 수면에 노을이 부서진다. 황금빛과 보랏빛으로 번진다. 물새 한 마리가 낮게 날아간다. 강은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지만, 길은 나를 집으로 되돌려 보낸다.
집에 도착한다. 책상 앞에 앉는다. 모니터를 켠다. 하얀 화면이 나를 기다린다. 커서가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깜빡인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이 굳어 있다.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린다.
나는 매화가 되고 싶었으나, 결국 석탑처럼 제자리에 앉아 있다. 모니터의 커서가 묻는다. 오늘 쓴 문장들은 천 년을 견디는 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봄밤의 매화 향기처럼 기꺼이 흩어질 것인가.
나는 답하는 대신 창밖을 본다. 저녁빛이 번진다. 내일도 나는 자전거에 오를 것이다. 단속사를 지나고, 석탑을 보고, 매화를 만날 것이다. 페달을 밟으며 답을 찾는 대신, 질문과 함께 달릴 것이다. 멈추지 않는다면, 그 질문들이 결국 나의 길이 될 것임을 알기에.
성찰의 시간이 끝나고, 일상의 자리로 돌아간다. 길이 순환하듯, 나의 두 번째 삶도 순환한다. 나가고 돌아오고, 보고 기록하고, 다시 나간다. 그 모든 여정은 돌아올 집이 있기에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