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어느 춘분날, 해인사 수다라장을 찾았다. 당시엔 예약 없이도 누구나 법보전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오후 2시 50분, 어둠이 깊은 수다라장 안으로 들어섰다. 대장경판을 보존하기 위해 설계된 공간은 서늘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바닥의 돌은 얼음처럼 차가워 그 기운이 신발을 뚫고 발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구석에 서서 숨을 죽였다.
2시 57분. 문살 틈으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비스듬히 들어왔다. 먼지 입자들이 빛의 궤적 속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3시 정각, 바닥에 연꽃 문양이 또렷이 피어났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이 돌에 닿는 순간, 차가웠던 돌 위로 미세한 온기가 전해졌다. 빛이 남기고 간 짧은 체온이었다. 3시 5분, 연꽃은 사라졌고 돌은 다시 차가워졌다.
1년에 단 두 번, 건축가가 자연과 맺은 약속의 시간이다. 문을 통과한 햇살이 바닥에 연꽃을 새기는 일은 우연이 아닌, 정교하게 계산된 질서의 산물이다.
몇 년 뒤 다시 찾은 수다라장은 예약제로 바뀌어 있었다. 1초 만에 마감된다는 예약의 벽 앞에서 나는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년 전 내가 본 그 5분의 빛이 얼마나 거대한 은총이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자유롭게 드나들던 시간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다. 매일 오후 3시. 나는 이 시간을 형벌처럼 지킨다.
은퇴 후 5년, 이 시간은 고독한 고행이다. 한때 오후 3시는 세상의 중심에서 가장 치열하게 소란을 피우던 시간이었다. 회의실 문이 열릴 때마다 나를 찾는 목소리가 복도를 채웠고, 내 결정 하나에 수십 명의 일정이 재편되었다. 전화기는 쉬지 않고 울렸다. 그 소란 속에서 나는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적뿐이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고요 속에서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지만, 쓴 문장의 절반은 백스페이스 키로 지워낸다. 어떤 날은 단 한 문장도 살아남지 못한다.
창문 너머 햇살이 책상 모서리를 비스듬히 스친다. 5분쯤, 그리고 사라진다.
2020년 2월, 나는 25년간 나를 증명하던 사각의 종이더미를 버렸다. 가볍게 쓰레기통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놀랐다. 청춘을 다 바친 무게가 이토록 가벼웠던가. 사라진 자리에는 가슴팍에 남은 네모난 자국과 공백뿐이었다. 그 상실을 받아들이는 데 3년이 걸렸다. 이제 나는 호칭 없는 삶을 수용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1년에 두 번 연꽃을 피우기 위해 수다라장은 나머지 363일의 어둠을 견딘다. 고정된 진리와 움직이는 시간이 만나는 찰나를 위해 건축가는 인고의 공간을 설계했다.
나의 오후 3시도 그렇다. 99일의 빈 문장을 견디면, 어느 날 단 한 문장이 빛처럼 내려앉을 것을 믿는다. 깨달음은 우연히 오지 않는다. 스스로를 결박한 질서 속에서만 찰나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자유롭게 출입하던 시절의 그 빛이 이제는 예약 없이는 볼 수 없는 귀한 것이 되었다. 내가 누렸던 소란한 영광도 과거의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때 보았던 그 5분의 온기가 지금 이 황량한 책상 앞을 버티게 한다는 것을
내일도 나는 오후 3시에 책상에 앉을 것이다. 빛이 오든, 오지 않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