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칼

빛나는 것과 지탱하는 것

by 건강한 오후

부엌 서랍을 열자 오래된 칼 한 자루가 손에 잡혔다. 스테인리스 날은 여전히 빛을 받으면 번쩍였지만, 검은 손잡이는 손때와 세월에 닳아 있었다. 움푹 파인 흔적마다 수십 년의 시간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칼로 무와 양파를 썰었다. 날은 단단한 것을 가르고, 손잡이는 묵묵히 내 손을 받쳐 주었다.


어머니의 부엌에도 낡은 식칼이 있었다. 수없이 갈려 얇아진 날, 손때와 기름때로 윤이 난 손잡이. 그 칼로 어머니는 생선을 발라내고, 고기를 저미고, 나물을 다듬으셨다.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 ― 똑, 똑, 똑 ― 그 리듬 속에 어머니의 하루가 있었다. 날은 일을 했고, 손잡이는 묵묵히 그 손을 지탱했다.


칼날은 스스로 날카로워지지 않는다. 불 속에서 달궈지고 망치에 얻어맞으며 모양을 갖춘다. 그러나 날만으로는 칼이 될 수 없다. 손잡이 없는 날은 그저 날카로운 쇳조각일 뿐이다. 대장간에서 본 풍경이 떠올랐다. 불꽃 속에서 단번에 빚어지는 날과, 오랜 손길로 다듬어지는 손잡이. 화려함은 날이 차지했지만, 완성은 손잡이의 몫이었다.


사람의 말도 그렇다. 날카로운 단어는 상황을 가르고 논리를 뚫는다. 그러나 그 말을 끝까지 붙드는 것은 침묵이다. 말이 침묵에 받쳐지지 않으면 허공에 흩어지고, 상처만 남는다. 반대로 짧은 말 뒤에 길고 단단한 침묵이 흐를 때, 그 말은 오래 남는다. 날보다 손잡이가 깊이를 만든다.


결심도 마찬가지다. 단번에 상황을 가르는 결심은 날카롭지만, 그 결심을 지탱하는 건 일상의 인내다. 나는 여러 번 날카롭게 결심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날만 있고 손잡이가 없는 칼이었다. 반대로 누군가는 거창한 결심 없이 매일 산책하고, 일기를 쓰고, 책 한 페이지를 읽었다. 번쩍임보다 지속을 택한 사람, 손잡이 같은 삶이었다.


아버지의 손이 떠오른다. 굳은살 박인 손, 번쩍이지 않았지만 우리 집을 지탱했던 손. 그 손은 날이 아니라 손잡이였다. 세상은 빛나는 것에 눈길을 주지만, 실은 손잡이 같은 것들이 삶을 버티게 한다.


밤이 깊어 부엌은 고요했다. 서랍 속의 칼도 함께 쉬고 있었다. 날은 가르고, 손잡이는 버틴다. 세상을 살아내는 일도 다르지 않다. 나는 이제 날카로움보다 단단함을, 번쩍임보다 지속을 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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