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완성되는 얼굴을 마주하며

by 건강한 오후

오후 세 시, 서재 창문으로 비스듬한 햇빛이 들어왔다. 오래된 벽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고요를 갈랐다. 책산 위, 손때 묻은 어머니의 낡은 사진이 절반은 빛났고 절반은 어두웠다. 사진 속 젊은 어머니의 얼굴도 빛과 그림자로 나뉘어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입가는 햇살을 받았지만, 깊어진 눈가는 짙은 그늘 속에 잠겨 있었다. 어머니를 온전히 안다는 것은, 그 밝은 미소뿐 아니라 그늘진 눈가까지 함께 보는 것이라는 걸.


빛은 언제나 사물의 한 면마을 비춘다. 눈부시게 밝은 곳 뒤편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빛이 사물의 존재를 드러낸다면, 그림자는 그 사물의 감춰진 뒷모습을 이야기한다. 책상 위 연필꽂이의 그림자가 실제보다 더 크고 길게 벽에 드리워지듯, 사물의 숨겨진 이야기는 때론 빛이 비치는 면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어린 시절, 나는 종종 그림자놀이를 했다. 어두워진 방 안, 스탠드 불빛 앞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벽에 토끼와 개를 만들곤 했다. 내 몸짓에 따라 꿈틀거리는 그림자는 실제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거대한 토끼가 벽 위를 뛰어다니고, 사나운 개가 으르렁거렸다. 그때의 나에게 그림자는 또 다른 나이자, 상상 속 세상을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존재였다. 손가락이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디테일까지 그림자는 기꺼이 채워주었고,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그림자는 언제나 나의 뒤를 따랐지만, 빛이 만드는 또 다른 형태의 나였기에 나는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 나는 점차 나의 그림자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늘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원했다. 직장에서는 유능하고 실수 없는 나를, 친구들 사이에서는 항상 웃고 즐거운 나를 보여주려 애썼다. 나의 약점, 실패의 경험, 때로는 초라한 감정들을 애써 감추려 했다. 빛이 닿지 않는 구석으로 밀어 넣듯, 나의 어둡고 불완전한 면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나는 완벽하게 빛나는 모습만이 진정한 나의 얼굴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완벽하게 빛나는 얼굴은 밋밋하고 평면적이었다. 명암 없는 그림처럼 생동감이 없었다. 은퇴 후, 비로소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의 그림자야말로 나를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실패했기에 겸손해질 수 있었고, 약했기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었다. 때로는 추하고, 때로는 부끄러웠던 나의 그림자들이야말로 나를 성장시킨 소중한 흔적들이었다.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본다. 그늘진 눈가에는 삶의 고단함과 인내의 시간이 서려 있었고, 그 덕분에 밝게 웃는 입가의 미소가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어머니의 온전한 얼굴은 빛과 그림자가 함께 만들어낸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나의 얼굴 역시, 밝고 빛나는 면과 어둡고 숨기고 싶은 면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진정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그림자를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는다. 어둡고 미숙한 부분들까지 받아들인다.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어야 하나의 사물이 온전히 존재하듯, 나의 모든 면을 긍정할 때 비로소 나는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의 그림자는 결코 나를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욱 풍요롭고 깊이 있는 존재로 완성시키는 소중한 일부임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