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y Hungry, Stay Foolish”
East
― John von Neumann’s Computer (Hardware) @Princeton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Tool로서의 IT, Back-end Infra, 선형적 연결, 효율성과 생산성
― IBM/Xerox, AT&T (Bell Lab; transistor) : 거대한 관료 조직
( cf. Wall Street: Money Never Sleeps, 2010 / Inside Job, 2010 / Margin Call, 2011 / The Big Short, 2015 )
West
― 연결(Connectivity), Digital, 분산 Network, 인간의 의식과 소통
― Silicon Valley (boomed-up by William Shockley), HP(전세계 최초의 Venture supported by Prof. Frederick Terman)
― Xerox PARC (Palo Alto Research Center) since 1970 : Mouse, GUI (and Steve Jobs)
― “1979년 애플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는 제록스의 연구소(PARC)를 찾았다. 제록스와 100만달러 투자 문제를 협의키 위해서다. 이날의 방문은 오늘의 애플을 있게 한 기념비적 방문이 됐다. 잡스는 이곳에서 제록스가 개발 중이던 컴퓨터 운영체제(OS)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 제록스는 ‘알토’란 컴퓨터를 개발 중이었는데 여기에 탑재된 운영체제(GUI)는 사용자가 가장 편리한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도록 고안돼 있었기 때문. 잡스가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삼성 갤럭시S + Apple iPhone (1 2)
( cf. The Social Network, 2010 / Silicon Valley, 2014 / Steve Jobs, 2015 )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 대항문화의 탄생과 LSD
냉전시대와 함께 서부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다양한 디지털 기술과 관련한 연구가 서부에서 진행되기 시작하고, 실리콘 밸리가 성장을 하는 것이 서부의 산업적인 미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인터넷과 관련된 네트워크의 철학과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커뮤니티 중심의 문화의 뿌리에는 미국 서부에서 뜨거운 바람을 일으켰던 대항문화(counterculture)가 있다. 이번 회의 내용은 인터넷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향후 설명하는 여러 인물들과 기술의 발전에 여러 가지 형태의 연관성을 가지는 배경이 되므로 반드시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대항문화란 1960년대에 기성사회 주류문화에 대해 대안적 삶의 방식과 의미체계를 제시한 사회운동을 일컫는다. 대항문화는 지배문화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일탈적 성격을 띤다. 1968년 시어도어 로작(Theodore Roszak)이 처음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는 소외심리, 동양적 신비주의, 환각약물, 공동체적 실험에 대한 젊은이의 관심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양식으로 대항문화를 정의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다. 경제적 발전은 소비패턴을 변화시켜 수 많은 전자제품이 등장하고 소비자들은 지속적인 소비를 풍요 속에서 하게 되고, 이것이 다시 경제를 끌어올리는 순환구조를 완성하였고, 이 과정에서 경제적 부를 축적한 백인들이 교외로 대규모로 이동을 하면서 도심에는 흑인들이 남아 빈민촌을 만들고 이로 인한 인종갈등은 더욱 첨예하게 확대되었다. 또한,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분리되면서 여성차별도 되려 심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사회경제적으로 풍요롭지만,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전후 자녀세대들(대개 베이비붐 세대)은 자연스럽게 부모들과 커다란 세대차이를 겪게 된다.
청년들은 상업화된 자유와 쾌락에 몰두하였고, 기성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받아들이는 것을 사회하라기 보다는 굴종과 노예화로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에 냉전체제와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정치사회적인 이슈로서 이들의 결속을 다지게 만드는데, 근본적으로 이들은 권력구조가 모든 삶의 의미를 전체주의적 통제 하에 놓고 감시한다는 것에 저항하였다.
1950년대에 새로운 의식과 감수성의 출현에 기여한 뚜렷한 문화현상으로 비트세대(beat generation)의 출현을 들 수 있다. 비트세대는 주류사회의 질서와 주류문화에 대한 저항이라기 보다는 이를 무시하는 문화적 이탈현상으로, 소설가 존 클레런 홈즈는 "단순한 싫증을 넘어서 일종의 소모되고 난 느낌과 다 발가벗겨진 느낌을 포함하여 정신, 그리고 결국에는 영혼의 일종의 무방비 상태, 의식의 바닥에까지 추락해 버린 느낌"으로 표현하였다. 문화적 반란으로서 대항문화는 일상생활의 가치질서를 새롭게 재조정하여 가치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소중하게 여기고 각 계층, 인종, 성, 세대 간의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는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대항문화에서 특히 중요시 되었던 것으로는 히피문화, LSD, 코뮌운동, 언론자유운동, 소비자운동, 흑인시민권운동, 여성운동, 게이 해방 운동, 베트남전 참전 반대 운동 등이 있다.
대항문화의 움직임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미국시민권운동이나 언론자유운동처럼 정치적 이슈와 관련된 것과 히피운동이나 코뮌운동처럼 새로운 문화와 사회를 만들자는 사회적 운동과 관련된 것이 그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대항문화가 꽃핀 직후에 미국 경제가 불황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점인데, 이를 통해 반대로 남부 백인 중산층 계급을 중심으로 보수주의 운동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뉘는 양당체계는 그 역사가 깊고, 여기에서 단순하게 다룰 주제는 아니지만, 대항문화와 보수주의 운동이 나타났던 이 시기의 지역별, 세대별 차이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인터넷의 역사와 관련하여 대항문화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LSD라는 마약이다. LSD는 당시 합법적으로 소지하고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인간의 의식을 확장시키려 한 시도나, 도시를 벗어나 자연에서 코뮌(commune)을 형성하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코뮌은 원래 지방자치제도를 채택한 중세 서유럽의 행정구에서 나온 용어로 시민들이 서로 보호하고 돕겠다는 맹세로 굳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항문화의 주역있던 청년들의 상당 수가 LSD와 락 음악에 심취했고, 자연에서 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이를 코뮌으로 불렀다. 당시는 텔레비전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였고, 역동적인 대중에게는 영상보다 음성이나 음악의 영향력이 훨씬 컸다. 우드스톡 락 페스티벌이나 밥 딜런으로 대표되는 포크 음악 역시 이들에게 있어서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내며,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LSD와 관련해서는 ‘티머시 리어리’라는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심리학자이자 작가로, 이 약물들을 폭넓게 실험하고 대중화하면서 숱한 사건과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서른 다섯 살 생일에 아내 메리앤이 자살한 뒤, 심리학자로서 어떤 심리 치료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하다가 환각약물을 만난다. 하버드 대학교 인성연구센터에서 대학과 교도소 등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로시빈과 LSD를 실험한 뒤, 환각상태의 ‘재각인 효과’를 통해 인성을 근본적이고 영구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게 하게 되지만, 이 일로 하버드에서 해고된다. 그는 그렇지만 연구를 멈추지 않고, 뉴욕 주 밀브룩의 깊숙한 곳에 빅하우스라는 연구센터를 만들어 많은 이들과 함께 다양한 약물로 의식의 여러 수준을 ‘여행’하고 이를 확산시켰다. 그는 환각을 통해 인간의 영역을 확장하고 인간에 관한 정의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실험은 동부에서 이루어졌지만, LSD와 코뮌 활동이 번성한 곳은 바로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였다. 그리고, LSD 체험을 시각화한 연극과 영상을 만들었으며, 헐리우드 영화에 출현하고, 우드스톡에 참여하였다. 급기야는 1969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도 출마했는데, 이 때 지미 헨드릭스가 기타를 연주하고 존 레논이 응원곡으로 <함께 해요 (Come Together)>를 만들기도 한다. 1970년 1월 마리화나 소지 등의 이유로 3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지만, 그해 9월 극좌파 운동단체 웨더맨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옥했으며, 알제리로 망명해 미국의 망명 정부를 세우려고 했지만 흑인 해방 단체 블랙팬서당에게 감금당하다 스위스로 재망명했다.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갔지만 결국 1973년 체포돼 95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1976년 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된 리어리는 강의와 영화 제작, 글쓰기에 전념하다 1996년 5월 3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LSD가 일으킨 환각상태는 사람들마다 다양했지만, 모든 살아 있는 것과 대화를 나누게 만들고 거대한 지구와 한덩어리가 돼 호흡하게 한다거나, 내면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몽상가가 되게 하는 등의 기묘한 경험을 선사하였다. 그러나, LSD가 일으키는 환각은 언제나 사고의 위험성을 유발할 수 있었고, 결국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존슨 행정부가 약물에 맞선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약물이 되었다.
LSD는 음악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당시 록 음악계에선 환각 상태에서의 자유로운 체험을 색채감 풍부한 비선형적 사운드로 표현해내려는 욕구가 움트고 있었다. 이를 사이키델릭 음악이라고 한다. 사이키델릭 연주자들은 전통적 작법을 무시한 동양적 음계와 악기를 사용했으며, 기타 효과와 기계로 변조한 사운드 등을 통해 몽환적 의식 상태를 표현했다. 1966년 야드버즈의 멤버인 제프 백은 그들의 음악에 불안정한 마이너 키의 멜로디를 붙이고 그레고리안 성가를 접목시키는 등의 이색적인 실험으로 사이키델릭의 탄생을 예고했다. 사이키델릭 음악은 비틀스와 도어스, 핑크 플로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 등 많은 그룹에 영향을 주었는데, MIT의 노버트 위너가 1948년 발표한 <사이버네틱스>와의 만남을 통해 디지털 세계에도 직간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게 된다.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 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는 많은 명연설을 남겼지만, 그 중에서도 2005년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식 연설을 최고로 꼽는 사람이 많다. 특히 연설을 마치며 했던 말인 "Stay Hungry, Stay Foolish" 라는 말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대표적인 명언으로 꼽힌다. 그런데, 실제로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누굴까? 이 말은 스티브 잡스가 청년 시절에 정말 소중하게 여겼다는 잡지인 <홀 어스 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의 폐간호 뒷표지에 적혀있던 말이다.
<홀 어스 카탈로그>를 만든 사람은 스튜어트 브랜드(Stuart Brand)이다. 그러므로, "Stay Hungry, Stay Foolish"는 스티브 잡스가 아니라 스튜어트 브랜드가 한 말이다. 이 잡지는 대항문화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인 1968년에 창간되었다. 당시 대항문화의 주역이었던 히피들은 '의식의 확장'과 자연으로 회귀해서 만든 코뮌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들의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 및 상품에 대한 정보를 <홀 어스 카탈로그>가 제공하였다. 특히 <홀 어스 카탈로그>의 창간호에는 1948년 출간된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의 서평을 실었는데, 스튜어트 브랜드는 LSD가 추구한 '의식의 확장'과 사이키델릭 음악의 '사이'의 운율, 그리고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가 가졌던 개념을 절묘하게 연결시켰다. 노버트 위너의 비트로 대표되는 정보과학이 네트워크와 통신 등에 의한 연결을 가지면서 디지털 세계가 확장되어 나가는 개념이 히피들의 '의식의 확장'에 대한 생각과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스튜어트 브랜드는 1938년에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주의 공업도시 록퍼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 동부의 최고 명문 사립학교로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도 다녔던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Phillips Exeter Academy)를 졸업하고 1956년에 스탠포드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생물학을 전공했는데, 그의 지도교수는 1968년 인구문제, 식량문제 등으로 인류와 지구전체의 파멸가능성을 기록한 <인구폭탄(The Population Bomb)>을 출간해 주목받았던 시스템 이론학자 폴 에를리히이다. 1960년 스탠포드를 졸업한 그는 육군에 입대하는데, 군대에서 낙하산부대훈련을 받은 뒤 보병 교관이 되었다. 보병 교관을 지낸 뒤 스튜어트 브랜드는 군대 내 사진작가로 활동하였는데, 2년 뒤에 제대하고 나서도 사진에 흥미를 느껴 본격적인 사진 공부를 시작한다. 이 때 대항문화를 대표했던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의 보헤미안 비트족 작가들과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는 미국 원주민 거류지에서 자주 방문하면서 미디어를 복합적으로 이용한 이벤트를 기획하는데, 미국 원주민과 서양인의 가치체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오타와 원주민 출신의 수학자인 로이스 제닝스(Lois Jennings)를 만나 결혼을 한다. 또한, 1962년 부터는 당시 합법이었던 LSD의 투약실험 피험자로 지원하여 LSD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 때 켄 키지(Ken Kesey)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영화화되어 더욱 유명해진 소설인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집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들은 LSD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운영했는데, 당시 첨단 미디어였던 텔레비전의 영상과 음성기술을 활용해 진행되었다. 어찌보면 그의 이런 활동도 사이키델릭 문화의 일면으로 볼 수 있는데, 정신의 확장이나 인간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에 큰 관심을 가졌고,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 이론에도 심취하였다고 한다. 어찌보면 1960년 대에 오늘날 가장 각광받고 있는 HCI(Human Computer Interface)에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셈이다.
이런 문화는 대항문화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는데, 스튜어트 브랜드는 USCO라는 단체를 통해 전통적인 작품과 작가를 명확히 구분하는 예술방식에 저항하는 것으로 많은 참여자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그러면서, 우주와 컴퓨터, 그리고 인간과 소통, 미디어 등의 통섭적인 접근을 하였는데, 우주와의 연결성에 있어서는 1966년 나사에의 '우주에서의 지구사진(속칭 블루마블 Blue Marble)'에 대한 공개운동을 주도하였다. 실제로 이 운동의 결과로 오늘날 누구나 알고 있는 위성에서 찍은 지구사진들이 공개되기 시작했고, 이 사진들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수많은 컴퓨터의 월페이퍼 이미지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에는 "우주선 지구(spaceship earth)"라는 말로 유명한 디자인 과학자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버크민스터 풀러는 지구가 하나의 구체이고,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것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지구가 수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여행하는 하나의 배라는 것을 우주선으로 표현한 것이다.
스튜어트 브랜드와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의 만남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필연일지도 모른다. 스튜어트 브랜드와 노버트 위너는 모두 생물학과 생태학을 공부했으며, 동시에 디지털 기술이 인간과 만나서 확장을 한다는 개념에 대해 시대를 뛰어넘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스튜어트 브랜드는 마샬 맥루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에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하였고, LSD를 통해 인간의식 확장의 가능성을 접했다. 여기에 미국 원주민 공동체 생활에 빠져들어 코뮌의 생활도 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통섭적인 대항문화의 전도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티브 잡스를 포함한 수 많은 실리콘 밸리의 인물들이 <홀 어스 카탈로그>를 통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홀 어스 카탈로그>에는 매우 다양한 상품이나 정보 등이 나열되어 소개되었는데, 서로 일관되게 하기 보다는 완전히 다른 것들의 관계를 상상해서 연결짓는 것을 유도하는 스타일의 독특한 레이아웃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스튜어트 브랜드는 오늘날의 융합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그런 연습을 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홀 어스 카탈로그>는 이렇게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샌프란시스코 만 인근의 예술, 과학, 기술, 저널리스트와 작가들을 연결했다. 1972년 <홀 어스 카탈로그>는 전미 도서상을 수상하는데, 이 때부터 그의 명성은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https://www.sec.gov/Archives/edgar/data/1326801/000119312512034517/d287954ds1.htm
*Facebook Headquarters : 1 Hacker Way, Menlo Park, California 94025
As part of building a strong company, we work hard at making Facebook the best place for great people to have a big impact on the world and learn from other great people. We have cultivated a unique culture and management approach that we call the Hacker Way.
The word “hacker” has an unfairly negative connotation from being portrayed in the media as people who break into computers. In reality, hacking just means building something quickly or testing the boundaries of what can be done. Like most things, it can be used for good or bad, but the vast majority of hackers I’ve met tend to be idealistic people who want to have a positive impact on the world.
The Hacker Way is an approach to building that involves continuous improvement and iteration. Hackers believe that something can always be better, and that nothing is ever complete. They just have to go fix it — often in the face of people who say it’s impossible or are content with the status quo.
Hackers try to build the best services over the long term by quickly releasing and learning from smaller iterations rather than trying to get everything right all at once. To support this, we have built a testing framework that at any given time can try out thousands of versions of Facebook. We have the words “Done is better than perfect” painted on our walls to remind ourselves to always keep shipping.
Hacking is also an inherently hands-on and active discipline. Instead of debating for days whether a new idea is possible or what the best way to build something is, hackers would rather just prototype something and see what works. There’s a hacker mantra that you’ll hear a lot around Facebook offices: “Code wins arguments.”
Hacker culture is also extremely open and meritocratic. Hackers believe that the best idea and implementation should always win — not the person who is best at lobbying for an idea or the person who manages the most people.
To encourage this approach, every few months we have a hackathon, where everyone builds prototypes for new ideas they have. At the end, the whole team gets together and looks at everything that has been built. Many of our most successful products came out of hackathons, including Timeline, chat, video, our mobile development framework and some of our most important infrastructure like the HipHop compiler.
To make sure all our engineers share this approach, we require all new engineers — even managers whose primary job will not be to write code — to go through a program called Bootcamp where they learn our codebase, our tools and our approach. There are a lot of folks in the industry who manage engineers and don’t want to code themselves, but the type of hands-on people we’re looking for are willing and able to go through Bootcamp.
http://www.businessinsider.com/facebook-history-photos-2016-9
“If you’re offered a seat on a rocket ship, don’t ask what seat. Just get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