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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턍규 Jan 21. 2022

“배움에 있어서는 어린아이가 되세요!”

박준용 (Joon Y. Park) 교수님에 대한 오마주

(장면 1)

  얼마 전 모 경영대학 교수님과 저녁식사 자리가 있었다. 경영학 교수님이신데 특이하게 경제학 Ph.D를 하신 분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가장 흥미로웠던 일화 하나.


  교수님께서 캐나다에서 가르치시던 시절, 교수직에 Apply 하는 하버드대학교 출신 박사의 추천서를 리뷰하실 일이 있으셨다 한다. 추천서 중 하나에 쓰여 있기를, “이 학생은 올해 Harvard Econ 졸업생 20명 중에서 10등입니다.”


 냉혹한 경제학의 세상...



  하긴, John Nash 대학원 박사 과정 추천서에는 아래의 단 한 문장이 적혀 있다고 하질 않나... 


He is a mathmatical genius

(출처 1)  (출처 2)



 더불어, Nash가 그의 나이 21세에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총 27페이지)에 적어낸 참고 문헌은 오직 두 개뿐이다. 전설적인 John von Neumann and Oskar Morgenstern의 게임이론 책과, Nash 자신의 논문.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경제학 학부 시절, 내가 만약 경제통계학과 계량경제학을 안 듣고 학부를 졸업했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스스로 조금이나마 경제학에 소질이 있는 줄로 착각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을 것이다. 그 관점에서 중간/기말 시험 평균 30~40점을 맞게 해 주신 박준용, 황윤재 교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고향 집에 중간고사 답안지를 가지고 있는데, 25점 만점에 11점을 받았었다. Excel로 배포되는 클래스 성적표에서 중간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100점 만점에 40점 정도면 클래스에서 중간을 한다는 의미.




(장면 2)

  경제학은 학생들에게도 냉혹한 학문이지만, 교수님께도 냉혹한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다른 학문에도 이런 것이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경제학에는 명백한 메이저리그 선수 명단이 존재한다. 2022년 9월에 새로 38명이 뽑혀서 현재 총 828명으로 구성된 명단은 아래와 같다.


https://www.econometricsociety.org/society/organization-and-governance/fellows



  메이저리그라고 표현했지만, 정확히는 이자율 이론이나 피셔 방정식으로 저명한 Irving Fisher 등이 1930년 설립한 이론경제학 분야 최고 학술 단체인 Econometric Society Fellow 명단이다. 어디선가 듣기로 매해 노벨경제학상은 거의 예외 없이 이 명단 안에서만 나온다고 한다.


  Ctrl + F를 눌러 Korea를 검색해 보면, 딱 한 명이 나온다. 현재 한국에 근무하고 있는 경제학자 중 유일한 메이저리거는 2010년 명단에 들어가신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의 황윤재(Yoon-Jae Whang) 교수님이시다. 이외에 한국 학자로는 게임이론 교과서에 이름이 나오는 유일한 한국 출신 경제학자 조인구(In-Koo Cho, Emory Univ., 2002~ ), 그리고 한진용(Jinyong Hahn, UCLA, 2003 ~ ), 신현송(Hyun Song Shin, BIS, 2004 ~ ), 최연구(Yeon-Koo Che, Columbia Univ., 2009 ~ ) 등이 있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황금기 10년을 지나고 나서는 이후에 새로 뽑힌 한국인 출신 학자는 없는 것으로 안다.





(장면 3)

  위의 List가 물론 절대적인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다만 나와 같은 일반인 입장에서 Google Search를 통해 찾을 수 있는 가장 공신력 있는 Source임에는 분명하다. (참고 기사)


  다만, 위에서 언급한 5명(황윤재, 조인구, 한진용, 신현송, 최연구)의 위대한 학자 외에 한 분이 더 계시다. 돌고 돌고 돌아서 오늘의 주제로 왔는데, 바로 조인구 교수님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2002년에 Fellow가 되신 박준용 (Joon Y. Park, Indiana Univ., 2002 ~ ) 교수님.


https://economics.indiana.edu/about/faculty/park-joon.html


  2001년 중앙일보에서 경제학 교수 142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국 국적의 경제학자 중 가장 업적이 뛰어난 사람이 누구냐?”)를 진행한 적이 있다. 중복 응답이 가능했고 1위는 53표를 얻은 조인구 교수님, 공동 2위 20표는 박준용, 최연구 교수님, 3위 14표는 최재필 교수님이 뽑혔다. 이 분들은 모두 Econometric Society의 멤버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4140940#home


  교수님께는 내가 수천 명의 흔한(?) 제자 중 한 명이라서 이름도 기억 못 하실 가능성이 높다. 다만, 페이스북이라는 매체 안에서는 감히 교수님께 나만의 드립력을 보여드릴 수 있기 때문에 무턱대로 아래와 같이 들이대고는 했지만...



(장면 4)

  대학교 1학년 2학기를 마칠 무렵, 그러니까 경제원론 1과 2를 듣고 나니 세상의 모든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2학년에 올라가 1학기에 미시경제학을 수강하면서, 이거 어디 가서 말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반면, 앞서도 고백했지만 나를 포함한 경제학과 학생들이 가장 인간적 번뇌를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중 하나는 2학년 2학기 경제통계학 중간고사 직후일 것이다. 아니, 그전에 수능에서 2문제 정도 나오기 때문에 간단한 거 몇 개 암기하면 통과할 수 있는 확률과 통계가 얼마나 크고 넓은 세상인지를 깨닫게 되는 경제통계학 첫 강의시간일 수도 있다.


  2001년, 14동 낡은 건물에서 시작된 박준용 교수님의 경제통계학 첫 시간은 너무 즐겁다 못해 아름다웠다. 내가 그 시절 얼마나 그 수업을 이해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경제학적 엄밀함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하필 그 해의 기말고사는 레전드급으로 꼽히는 월드시리즈와 겹쳐서 마음마저 뒤숭숭했다. (김병현의 애리조나가 양키스와 맞붙었던 바로 그 해다!)


  교수님은 첫 시간에 우리가 고등학교 때 몇 시간에 걸쳐서 배운(혹은 암기한) 확률을 엄밀하게 정의하는데 한 학기 내내 시간을 쓰실 거라 했다. 한 학기 동안 확률을 배운다고? 공식 몇 개 암기하면 되는 거 아냐?


  공리(Axiom)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설명하신 뒤 확률을 정의해 주셨다. “Probability는 Event에 Number를 Assign 하는 Function인데, 3가지 Axiom을 만족해야 한다.”


자... 여러분 잘 아셨죠?
이제, 저를 따라 하세요.


  읭? 따라 하라고? (피식...)


(선창) “Probability는...”
(후창) “Probability는...”


(선창) “Event에 Number를 Assign 하는 Function인데...”
(후창) “Event에 Number를 Assign 하는 Function인데...”


(선창) “3가지 Axiom을 만족해야 한다...”
(후창) “3가지 Axiom을 만족해야 한다...”


(선창) “첫째 Non-negativity, 둘째 Total Probability는 1, 셋째, Disjoint Union의 Probability는 각 Probability의 합 (Countable Additivity)...”
(후창) “첫째 Non-negativity, 둘째 Total Probability는 1, 셋째, Disjoint Union의 Probability는 각 Probability의 합 (Countable Additivity)...”


  나를 포함한 15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후창으로 따라 하기는 했지만, 많은 학생들이 피식 대거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의실이 꽉 차서 서서 듣던 수강생 중 몇몇은 교실 밖으로 나갔던 것 같기도 하다. ‘무슨 이딴 수업이 다 있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장면 5)

  교수님은 약간 당황해하는 표정을 지으셨지만, 이내 종종 이런 일을 겪는다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으시고는, 바로 전설적인 그 이야기를 해 주셨다.


여러분, 배움에 있어서는 어린아이가 되세요!


 

 한국이 낳은 현존 최고의 경제학자 중 한 명, 바로 그분이 아침마다, 혹은 연구실에 앉아서 공부를 시작할 때마다 생각하는 바로 그 문장이  “배움에 있어서는 어린아이가 되자!”라는 말씀.


  이해를 했다면, 암기하고 굳히기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이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절대로 절대로 자만하지 말고 하루하루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블록을 쌓아간다고 (building block) 생각하고 지치지 말고 노력하라는 조언이다. 너무 뻔하지만, 너무 지키기 어렵다. 특히나 나이가 들고 머리가 굵어질 수록 더 그렇다.


https://www.facebook.com/tyangkyu/posts/10225676484159306




(장면 5)

  교수님은께서 페이스북을 자주 하시진 않으시지만, 7년 전에 이런 글을 남기신 적이 있다.


나는 어려움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으며, 따라서 내 인생의 목표가 나를 조금이라도 더 완성시키는 데 있다면, 주어지는 어려움을 피할 것이 아니라 기쁘게 받아들여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2001년 2학기) 교수님의 생생한 영상이 KBS 뉴스 속에 남아 있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67619


  20년 전 경제통계학 수업을 떠올리니 오늘 밤은 잠이 안 올 것 같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이 생각한다. 몸과 마음이 흩어지고 무너질 때마다 다시 되뇐다. 부끄러워하지 말자, 배움에 있어서는 어린아이가 되자!



나는 지난 30여년간 계량경제학자가 된 것을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계량경제학은 이론적으로 추상적인 수학적 논리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그 목적하는 바는 지극히 실제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있다. 그래서 엄밀한 논리를 추구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유용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나의 학문적 성향과 더할 나위 없이 잘 맞는다고 느낀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001&oid=015&aid=0002766339




  (p.s. 1) 1955년생이셔서, 올해 한국 나이 기준으로 68세인 박준용 교수님은 아직도 인디애나대학에서 현역이시고, 여전히 열정적으로 논문을 Publish 하고 계시다. 교수님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CURRICULUM VITAE가 있는데, 2020년과 2021년에도 논문을 발간하셨다.


https://ecostat.skku.edu/ecostat/intro/faculty_economics.do?mode=view&perId=LZStrMYDwygLgzgYgnAVwCwDMCWBNAbgBgNYBCA7APIBsAVgBoCKAvHUA%20&


  (p.s. 2) 교수님은 인디애나대학교와 함께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 문행석좌교수(정년보장 이후 교육 및 연구업적이 우수한 자로서 기금, 대외연구비 유치로 교육·연구에 종사하도록 위촉된 교원)로 임용되어 있으신데, 지난해 6월 상금 등으로 받으신 1억 원을 발전 기금으로 기부하셨다. 함께 기부하신 장유순 교수님도 인디애나대학교에 계신데, 두 분은 최고의 동료 학자이자 부부이시다. 2002년에는 함께 『경제시계열 분석』책을 공저하시기도 했다.





(p.s. 3) 장유순 교수님은 2022년 매경 이코노미스트 상을 수상하셨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001&oid=009&aid=0004906438


이 상은 2004년에 박준용 교수님도 수상하신 상이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001&oid=009&aid=0000355853



별로 해 놓은 것 없이 연구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고 생각되던 즈음에 상을 받게 돼 나 개인적으로는 큰 위안과 더불어 새로운 자극이 됐다.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 이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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