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자기 계발과 가족 이야기
(p.78) 어느 해인가 엄마가 생일 카드에 이런 글을 적어 주셨다. ‘네가 지금까지 자라면서 세상의 모든 기쁨을 엄마에게 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너는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된단다.’
(p.81) 아빠는 네가 창피해하거나 자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 결과로 실망하지도 말아라. 아빠는 너의 모습 전부를 사랑하지, 한두 가지 것으로 사랑하진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라.”
(p.38) 최근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며 살았어?” 엄마는 잠시 멈춰 생각하다가 말했다.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 뭔가를 할 수 있으면 해야지. 삶이란, 사는 거잖아.” (…) 로스쿨 2학년 내 생일날 엄마에게서 온 메일에 이런 구절이 있다. “소은아, 매일매일 꼭꼭 눌러서 살자.”
(p.10) 그들은 물었다. 어떻게 두 딸을 키울 수 있었느냐고. 글쎄, 내가 정말 어떻게 키웠지? 상대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궁금해서 곰곰 생각해보니 딱 한 단어만 떠올랐다. 방목! 그래고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내가 가장 자주 했던 말은 이것이다. “잊어버려(Forget about it)”
(p.11) 나는 육아법이나 교육론 관련 책을 세심히 읽어본 적이 없다. 다만 다른 부모와 다름없이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함께하며 부모로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순간순간 많이 고민했을 뿐이다. 내 사고, 언어, 행동의 출발점에서 중심을 잡아준 것은 언제나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아이들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아이들이 출세하기를,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욕심을 어떻게 내려놓을지 고민했다. 아내와 나는 최대한 그 고민을 내려놓고 살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는 아이의 인생을 살아간다. 결코 내 인생이 아니다. 새롭게 세상을 살아갈 아이에게 이미 충분히 살아온 어른의 관점에서 욕심을 주입하는 것은 아이가 나아갈 대로를 샛길로 좁혀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른의 관점에서 욕심을 부리지 말자.’ 나는 이것을 내 판단과 언행의 기준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p.167) “오늘을 유익하게 잘 보내자,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불확실하니 오늘에 충실하자, 이렇게 다짐했다. 나를 붙잡아줄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를 지탱하게 해 준 최선의 사고는 이것이었다. ‘Here and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