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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턍규 Sep 18. 2022

리뷰 : 장강명, 『재수사』

자의식의 과잉 vs. 소설가적 성취 중의 그 어디쯤

  한 달 전쯤 초판 1쇄로 사두었던 장강명의 신작  『재수사』를 읽었다. 현실적인 경찰 소설을 쓰고 싶다는 목표 아래 2020년대 한국 사회 풍경을 담고 그 기원을 공허와 불안에서 찾고 싶다 한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쓴 소설 중 가장 마음에 듭니다.”라며 비장함을 드러낸다.




  장강명은 이번 장편을 6년 만에 내놓는다. 나는 종종 시간을 ‘5년’에 비유한다. 분야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5년이면 박사 학위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이 생각의 기준이다. 5년이면 특정한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기주장과 전문성을 세울 시간이 된다. 5년이면 어떠한 프로덕트에서 일정 수준의 고객 만족과 완결성을 갖출 이력이 된다.



  그 5~6년이라는 시간이 소설의 장단점을 만들어 냈다.


  6년 동안 장강명은 신(神)와 인간의 문제, 도덕 가치와 정의, 종교, 계몽주의, 사실-상상 복합체, 트롤리 딜레마와 함께 도스토옙스키 5대 장편(『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백치』, 『미성년』),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관해서 광범위하게 탐구했다. 특히 거리의 제곱에 비례/반비례하는 우주적 물리법칙에 따라 트롤리 딜레마를 바라보는 장강명의 시선은 천재적이다.


  특히 ‘열린책들’이라는 고유명사까지 사용하며, 『죄와 벌』과 『백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곳곳에서 인용하며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다. 소설의 첫 페이지를 따옴표로 시작한다.



  1권과 2권 모두는 홀수 챕터가 범인의 독백, 짝수 챕터가 메인 스토리(22년 전에 사람을 죽이고도 수사망에 잡히지 않은 범죄자와 22년 전 발생한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가 등장하는 수사물)로 구성되어 있는 매우 독특한 형태다. 홀수 챕터는 짝수 챕터에 범죄의 배경에 개연성을 갖게 하고, 짝수 챕터는 홀수 챕터와 연관되거나 때로는 무관하게 긴박하게 흘러간다. 22년 전의 사건을 3개월 만에 다루는 배경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이 아쉬운 부분!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아니 읽는 내내 기계적이라고 까지 느껴질 홀/짝 배치는 불편한 느낌을 준다. 억지스럽다고도 느낄만한 하다. 홀수 챕터로 구성된 부분의 80% 가량은 《장강명의 철학 강의 : 계몽주의의 역사》로 불릴만한데, 중언부언하고 지식 나열을 하는 그 부분이 내내 불편하고 잘 안 읽히며 소설을 소설로서가 아니라 장강명의 에세이 혹은 자기 자랑이거나 자의식의 과잉처럼 느끼게 한다.


  경찰 소설 그 자체로도 범행 동기가 너무 간단하거나 뻔해 보인다. 홀수 챕터의 수많은 지식(정확히는 장강명의 주장) 나열 대비, 책의 마지막 10%를 남기고서야 부리나케 달려 나가는 살인의 모티브와 배경은 너무 단순하다. 장강명의 연작소설 《산자들》이 주었던 감동이 매우 깊었기에 이번 장편이 더욱 아쉽다.

 

  《산자들》은 11년의 동아일보 기자 생활을 통해 사회를 다방면으로 경험하고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시대 문제를 소설 속에 담아낸 명작이다.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의 3개 챕터로 이루어져 있으며, “2010년대 한국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주제로 한 연작소설을 쓰자.”라는 작가의 말처럼 취업, 해고, 구조 조정, 자영업, 재건축 등을 소재로 처절한 먹고사니즘을 다룬다.



  ▦ 자르기 (3편) : 알바생 자르기, 대기발령, 공장 밖에서

  ▦ 싸우기 (4편) : 현수동 빵집 삼국지, 사람 사는 집, 카메라 테스트, 대외 활동의 신

  ▦ 버티기 (3편) : 모두 친절하다, 음악의 가격, 새들은 나는 게 재밌을까?


  특히 베이커리 간의 다툼을 다룬 「현수동 빵집 삼국지」가 흥미로웠는데, 치킨 튀기기에 비하면 고상해(?) 보이는 빵집이 실은 아침과 저녁, 정확히는 밤 장사를 위해 고된 노동이 1년 내내 이어짐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 저희 같이 밤 11시에 문 닫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늦게까지 영업하기 너무 힘들지 않으세요? 저희 집 문 언제 닫는지 살피고 그러지 않으세요?”)


  장강명이 소설을 쓰면서 밝힌 아래의 문장은 마치 비장한 출마 선언문처럼 읽히는데, 『열광 금지, 에바 로드』와 같이 르포 기사와 소설을 넘나드는 기법적 참신함뿐만 아니라, 소재를 고르고 또 이를 극화하는 데 있어서 단연 독보적인 소설가 장강명의 가치를 적절히 드러낸다. 현상 그 자체보다 배경과 “왜?”에 집중하는 탁월함!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인 장면들을 단순히 전시하기보다는 왜, 어떻게, 그런 현장이 빚어졌는지를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반면, 『재수사』의 뒷면에 달린 정유정의 추천사를 뒤집어 읽으면 알 수 있듯, 정통 추리 소설이라도 하기엔 애매하며 지적 유희 혹은 사유의 과잉이 느껴질 Risk가 있고, 생각보다 뻔한 반전과 너무 싱거운 결말이라고 비판받을 개연성이 높다.




  장강명은 김훈과 함께, 기자로서 경험한 우리 사회의 일상과 하부 구조를 소설에 적절히 녹여내는 탁월한 작가다. 그만큼 기대가 컸기에 다소의 실망이 있었을 뿐, 『재수사』는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탁월하다. 기대치가 너무 높기 때문에 실망을 거두기 어려운 것일 뿐.


  더불어 한 가지 더 걸리는 점은, 장강명은 헤르만 헤세와 관련하여 아픈 기억이 있는 듯하다는 점. 1권 273~275 페이지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문학에서는 모호한 단어를 겹겹이 쌓아 올려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장할 수도 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대표적인 사례다.
헤세는 도스토옙스키와 달리 얄팍하다.
『데미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한 분위기만 풍기는 빈 깡통이다.
아무래도 『데미안』이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는 인용하기 좋은 명문장이 많이 나와서인 것 같다. 물론 세상에는 자기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중년 여성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그런 아주머니라도 아들 친구를 유혹하면서 “나는 선물을 주지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하고 말하지는 않으리라. 어떻게 소설가가 제정신으로 그런 장면을 쓸 수 있을까?”


  적어도 이번 작품에만은, “모호한 단어를 겹겹이 쌓아 올려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장강명의 홀수 챕터인 것 같다. 즐거운 독서이고 싶었으나 복잡한 독서가 되어 버렸다. ‘사실-상상 복합체’라는 장강명 철학의 신조어는 소설 본문에 도대체 몇 번이나 반복된 걸까? 50번 정도?


  그의 또 다른 5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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