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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덕후 Jan 13. 2019

포기라는 전례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호주 워킹홀리데이 이야기#5


어렵게 누사에서 자리를 잡긴 했지만 애초에 내가 호주에 온 목적 중 하나는 대학 학자금 등록금 대출을 갚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대도시로 떠나기로 했다. 고민 끝에 당시에 내가 머물던 누사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이자 호주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인 브리즈번 Brisbane 으로 떠났다. 그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다행히 브리즈번은 대도시 답게 일자리가 정말 많았다. 누사에서 바리깡으로 머리를 빡빡 밀었던 정신상태로 무장하고 구직활동을 해본 경험이 쌓인 탓인지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했다.


결과적으로는 총 3곳에서 동시에 일했다.


일명 쓰리 잡.


대신 주 80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시간을 견뎌야 했다. 특히 주말에 일했던 슬라이스 피자 Slice Pizza 에선 술에 취한 호주인들을 대상으로 조각 피자를 팔아야 했기 때문에 저녁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일했다. 집에가 잠깐 눈을 붙이고는 다시 오전 10시에 일어나 호주에서는 꽤나 유명하고 큰 체인인 난도스 Nando’s 라는 포루투갈식 치킨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주 80시간!


물론 호주 노동법으로는 주 80시간이 허용되지 않기에 난도스와 슬라이스 피자 이외에, 한국분들이 운영하는 일식집에서 추가로 일자리를 구했다. 호주에는 악덕한 한국인 고용주들이 많았는데 내가 일했던 곳의 사장님, 사모님은 감사하게도 정말 좋으신 분들이었다. 정말 돈을 버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버텼던 나름 즐거운 시기로 기억에 남아있다. 주에 100만원 이상을 저축했는데, 주 천 달러를 번다는 것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와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꿈의 숫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 목표를 꽤 빨리 이뤘다. 하루하루 고된 일을 끝냈지만 차곡차곡 계좌에 쌓여 높아져가는 숫자를 보며 뿌듯해하는 한국에서 온 노동자. 그게 당시의 내 모습이었다.


브리즈번의 인공해변


그렇게 브리즈번에서의 나름 만족하며 지내고 있던 어느날 나는 멜버른 Melbourne 으로 이동을 해야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멜버른은 영국의 시사 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표하는 조사 결과 5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혔다. (2017년 까지 7년 연속으로 1위를 지켜오다 2018년 오스트리아 빈에 1위 자리를 내주고 2위에 랭크 되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먼 호주까지 와있고,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다시 해외에서 살아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다는 도시,
나도 한 번 살아보자!


그렇게 나는 충동적으로 멜버른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내가 브리즈번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날 말렸다. 여기서 이렇게 나름 괜찮은 일자리를 3개나 가지고 있고 돈도 많이 벌고 있는데 굳이 왜 리스크를 지려고 하느냐고. 그때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앞으로 인생을 살다 보면 어려운 순간이 정말 많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용기 있게 도전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내가 이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현실에 안주하는 내 개인 인생사의 전례를 남기면 안되겠다고.


언젠가 또 어려운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포기의 전례가 있으면 난 더 쉽게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나는 멜버른으로 떠났고 그 곳에서 정말 소중한 인연들을 만났고 또 잊지못할 추억을 많이 쌓았다.


1년간의 호주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내 통장에는 2,500만원이 있었고, 2,500만원으로는 티끌만큼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추억과 경험이 아주 강렬하게 가슴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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