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틴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일까
퇴근길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공기는 여전히 눅눅했다.
고길동은 편의점에서 캔맥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계산대 너머의 점원이 말했다.
“삼천오백 원입니다.”
그 금액이 왜 이리 비싸게 느껴지는지,
그도 잘 몰랐다.
집에 도착해 불을 켜자
거실 한쪽에 낡은 인형이 쓰러져 있었다.
딸아이가 어릴 적 좋아하던
둘리 인형이었다.
“아직도 있었냐.”
그는 무심히 중얼거리며 인형을 세워두었다.
얼굴엔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익살스러운 웃음만은 그대로였다.
TV를 켜니 뉴스가 흘러나왔다.
AI가 그림을 그려 상을 탔다는 이야기.
로봇이 배달을 시작했다는 이야기.
사람은 점점 필요 없어지고 있다는 이야기.
고길동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싸한 감각이
오늘 하루를 버텨낸 자신에게 주는
유일한 위로 같았다.
회사에서는
벌써 ‘정리’라는 단어가 공공연히 떠돌았다.
팀장은 후배에게 보고서를 넘기며 말했다.
“요즘은 GPT가 더 잘해.”
농담처럼 들렸지만
고길동은 웃지 않았다.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반쯤 남은 김치통,
캔맥주 한 줄,
딸아이가 남겨둔 요구르트 하나.
그 순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인생 너무 어렵게 살아요.”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둘리 인형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야, 이제 말까지 하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때는 웃었잖아요.
지금은 왜 이렇게 진지해졌어요?”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고길동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냉장고 문을 닫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머릿속엔 숫자들이 떠올랐다.
매달 25일, 대출 상환일.
87만 원짜리 사교육비.
관리비 고지서.
자동이체된 보험료.
그리고 다가오는 전세 재계약.
모든 게 숫자였다.
모든 게 의무였다.
그는 가끔
자신이 사람인지,
가족과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인지 헷갈렸다.
“형님, 진짜 괜찮아요?”
둘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괜찮지.”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안 괜찮으면 누가 버티겠냐.”
그 말에는
조금의 믿음도 없었다.
새벽 두 시.
도시는 잠들었지만
창밖 불빛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고길동은 책상 위의 서류철을 덮고
마지막 맥주 캔을 비웠다.
둘리 인형을 바라보며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나 아직 괜찮다.
내일도 출근해야지.”
그건 다짐이 아니라 주문이었다.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한
최후의 주문.
불을 끄고 누웠다.
눈을 감는 순간,
어린 시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형님, 그래도 웃으면서 살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
끝맺음
누군가는 말한다.
고길동은 화만 내는 아저씨라고.
하지만 세상은 모른다.
그가 왜 화를 냈는지,
그가 왜 아직 버티는지를.
그는 단지,
무너질 수 없어서 버티는 사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