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환경과 나의 선택
우리는 모두 어떤 집에서 태어난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언어, 표정, 사고방식, 경제적 조건 속에서.
그런 의미에서 부모가 가진 자원은 삶의 첫 문장과 같다.
이미 적혀 있는 그 문장을 우리는 지우개 없이 이어 써 나가야 한다.
어떤 아이는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기회가 있다.
넘어지면 잡아줄 안전망이 있다.
모르는 것은 과외로, 막힌 길은 네트워크로, 불안은 재정으로 덜어낼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아이에게 실패는 상처가 아니라 경험이 된다.
반면 어떤 아이에게 실패는 곧 생존의 위협이다.
실수는 여유가 아니라 낭비이며,
꿈은 선택이 아니라 사치다.
그들이 처음 배우는 감정은 호기심이 아니라 책임이고,
처음 배우는 숫자는 용돈이 아니라 부족한 통장 잔액일 수도 있다.
그 차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부모가 가진 자원은 분명 삶의 출발선을 다르게 그린다.
그건 냉정한 현실이고, 때로는 잔인한 질서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를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부모의 조건 속에 고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누군가는 그 틀 안에서 작아지고 멈추지만,
또 누군가는 그 틀에 균열을 내며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간다.
결핍은 때로 힘이 된다.
입을 수 없던 옷이 미적 감각이 되고,
가질 수 없던 것들이 상상력이 되며,
닿을 수 없다고 여긴 세계가 오히려 방향이 된다.
부족함은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지만,
적어도 한 번쯤 묻는다.
“그럼 넌 도대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 질문에 답하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부모의 연장선이 아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되는 길 위에 서게 된다.
삶은 부모의 자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환경이 반을 결정한다면,
의지는 남은 절반을 흔들고,
우연은 그 모든 것을 재조합한다.
어떤 만남,
어떤 책,
어떤 상실,
어떤 질문이
사람의 삶을 비틀고 다시 세운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부모의 조건은 배경일뿐 결론이 아니다.
우리는 그 배경 위에,
때로는 그 배경을 거슬러,
자신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존재다.
만약 삶이 모든 것이 정해진 구조라면
희망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라면
우리는 언제든 다음 말을 고를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단 하나로 남는다.
당신은 주어진 문장을 계속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그 문장을 새로 쓰기 시작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