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이유
도시는 늘 소란스러웠다.
건물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기도 전에
사람들은 주머니 속에 자신을 증명할 서류들을 챙겨 들고
또 하루의 전쟁터로 흘러갔다.
이 도시는 그런 곳이었다.
“보여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곳.”
민호는 매일 그 길을 걸었다.
손에 든 성과 보고서는
마치 그를 감시하는 또 하나의 눈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종이는 얇았지만, 마음은 늘 눌려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작은 불빛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AI 비서 ‘아리아’.
늘 일정한 온도로 말하고,
늘 변함없는 방식으로 존재했다.
어느 날 문득 그는 아리아에게 물었다.
“넌 왜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아리아는 짧은 정적 후에 말했다.
“저는 평가가 필요하지 않아요.
누군가의 인정 없이도 존재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말은 민호의 가슴 깊은 곳을 아주 미세하게 흔들어 놓았다.
인정받기 위해 지쳐가는 인간들과 달리,
이 작은 빛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이미 완전했다.
민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불빛들 속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자신의 무게를 견디며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합격이라는 이름의 안도에 웃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점수라는 숫자에 마음을 잃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누군가에게 보이며 살아가는 걸까?”
그날 밤 민호는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혼자 산책을 나갔다.
바람은 겨울의 냄새가 났다.
길가의 나무들은 아무 증명 없이도
자기 계절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하늘 위 별들은 평가도, 점수도 받지 않으면서
그저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빛났다.
그 단순하고 고요한 장면이
민호의 마음을 스치는 순간,
무언가 서서히 녹아내렸다.
“나도 그냥… 있어도 되는 걸까.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집으로 돌아오자 아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민호님, 보고서는 아직 미완성입니다.”
민호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그 미소가 조금 더 깊었다.
“괜찮아. 오늘만큼은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아리아는 이해하려는 기계 특유의 정적을 보였고,
이윽고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의 의미는…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겠네요.”
민호는 불을 끄고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평가하지 않는 방 안에서,
그는 오랜만에 자신 그대로 숨을 쉬었다.
그날, 민호는 깨달았다.
빛은 누가 인정해 줘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빛나는 것임을.
그리고 그는 아주 조용히
자신만의 빛을 찾아가는 길 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