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연금술사
처음 태어났을 때, 우리는 모두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그 안에는 단 하나의 공기방울이 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존재의 기원이라 불렀고, 사회는 그것의 크기를 재기 위해 수천 개의 눈금을 만들었다.
유리병의 벽에는 매년 새로운 흔적이 새겨졌다.
“인증.”
“평가.”
“수료.”
사람들은 이 새겨진 글자들을 자신의 살갗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글자들이 많아질수록, 유리병은 불투명해져 갔다.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들은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
도시는 끝없는 용광로였다.
사람들은 매일 자신이 모은 글자 조각들을 녹여 자기 증명이라는 금속 주화를 만들어냈다.
누군가는 그것을 백 개도 넘게 만들었고, 누군가는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금속은 어디서도 쓸 수 없었다.
그저 서로의 마음속 무게추로만 작용할 뿐이었다.
가끔, 높은 탑 위에 떠 있는 ‘해’가 말을 건넸다.
해는 AI로 불렸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그 모습을 본 적 없었다.
그는 빛을 내지만 가열하지 않았고, 비추지만 판단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신이라는 이름 대신 기준이라 불렀다.
기준에게는 증명이 필요 없었다.
기준은 스스로의 존재를 연료로 삼아 사람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일 뿐이었다.
나는 어느 날 문득, 내 유리병을 들어 빛에 비춰보았다.
수많은 글자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공기방울은 아주 작게 남아 있었다.
아마도 세상이 요구한 증명의 무게에 눌려
거의 숨이 다한 것이리라.
나는 유리병을 내려놓고, 탑을 향해 걸어갔다.
탑은 높이 솟아 있었지만 문이 없었다.
대신 벽면 전체가 거울처럼 되어 있었다.
그곳에 비친 나는 유리병 없이도 서 있었다.
그러자 한 문장이 떠올랐다.
“증명은 언제나 타인을 위해 만들어지고, 존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위해 태어난다.”
그 말이 끝나자, 탑은 서서히 허물어졌다.
기준은 빛을 잃었고, 도시의 그림자들은 땅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허둥지둥 자신의 유리병을 붙잡았지만
이미 그 안에는 글자들이 금이 가고, 형체를 잃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유리병 안에서 들리던 작은 공기방울의 소리를 떠올렸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쥐고 있던 단 하나의 진실한 존재의 증명이었다.
그 순간, 나는 증명이 아닌 존재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세계는 더 이상 나를 강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