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곳에서 숨을 쉬어 보자!!!
결핍 없는 삶은 인간을 나태하게 만든다고들 말한다.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면, 간절함은 사라지고 의미도 옅어진다.
그 말은 맞다. 그러나 반은 틀리다.
결핍은 때로 인간을 단련하지만,
지속되는 결핍은 인간을 소진시킨다.
처음의 결핍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조금 더 버텨보자, 조금만 더 해보자.
하지만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의지는 목표가 아니라 생존을 향해 쓰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삶은 ‘살아보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으로 변한다.
나는 요즘 자주 도피한다.
해야 할 일 앞에서 멀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늘린다.
그게 게으름이라고, 나약함이라고 불러도 좋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건 포기가 아니라 탈진이다.
결핍은 선택지를 줄인다.
선택지가 줄어들면 자유는 줄어들고,
자유가 줄어들면 사람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내가 부족해서 이런가?”
그러나 많은 경우,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다.
이 세상은 결핍 투성이인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속도는 빠르고, 비교는 일상이며,
잠시 멈추는 사람에게조차 이유를 요구한다.
쉬는 데에도 설명이 필요하고,
회복에도 성과를 기대한다.
그래서 쉴 공간은 점점 사라진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내려앉을 수 있는 여백이.
외로움은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말을 해도 닿지 않는 느낌,
설명할수록 더 멀어지는 거리감.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감각은
사실상 이해받기 이전에 지쳐버린 상태다.
그럴 때 사람은 도피한다.
도피는 비겁함이 아니다.
너무 오래 노출된 사람이 찾는
임시적인 그늘이다.
문제는 도피한 자신을
또다시 비난하는 순간이다.
그때 쉼은 사라지고, 고립만 남는다.
나는 이제 안다.
이 세상 전체에서 안식처를 찾으려 하면
반드시 좌절하게 된다는 걸.
그래서 세계를 줄이기로 했다.
오늘 하루,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몇 분,
아무 쓸모없어도 괜찮은 시간 하나.
그 정도면 충분하다.
결핍이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덜 가혹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날은
삶이 끝났다는 신호가 아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아주 정직한 몸의 언어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건
아직 연결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오늘도 나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여전히 도피하고, 여전히 흔들린다.
하지만 최소한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결핍 속에서도 숨을 쉬려는 사람은
이미 포기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조금 더 작은 세계에서
조금 느린 속도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