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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형준 Dec 05. 2018

한파가 찾아온다는 소식에

12월 5일의 일

예고 없이 찾아온 기상 변화


소리도 없이 내려앉은 구름은 차가운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어김없이 찾아온 한파 소식에 옷장 구석에서 나프탈렌 냄새 가득한 파카를 꺼내 입었지만, 요즘 입기에는 많이 짧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사실 짧든 길든 밖에 잘 나가질 않아서 크게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나갈 때 주눅 들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이었다.


보통은 수능을 볼 때쯤 아주 추웠던 것 같은데 그보다는 일주일 정도 늦게 찾아온 것 같아, 작년 겨울보다 더 추울 거라는 예보가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막상 한파가 닥친다고 하니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마음도 얼어있고, 몸도 얼어있을 것이 분명하다.


지난 밤의 일


며칠 전, 을지로에 다녀왔다. 단순히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재미있게도 을지로 골목에는 '을지 유람'이라는 이를테면 제주도의 올레길 같은 코스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나라의 여러 산업이 흥하던 시기에 분주하게 돌아가던 기계 소리가 몇 군데에서만 조용하게 들려왔다. 주말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를 일이다.


자물쇠로 굳게 걸어 잠근 셔터 사이로 희미한 내부 공간을 들여다보니 대부분의 작은 공장은 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을 것 같은 기계들은 온데간데없고 텅 빈 공간만 남은 채로 허전하게 찬 공기가 들어서 있었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공장 주인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한파가 찾아오기 전 들이마신 숨이다. 한 번 호흡을 내뱉고 강하게 들이쉰 공기는 꽤 거칠어서 목을 따갑게 만든다. 공기가 차갑다는 것도 모른 채로 힘겹게 숨을 쉰다. 겨울 뒤에는 늘 봄이 찾아왔는데 최근 몇 년 간은 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미세먼지에 둘러 쌓여 어느새 여름. 그렇게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와 겨울이 되어버린다.


겨울은 힘든 계절이다. 나무는 잎을 떨구고, 새싹은 숨을 죽이고, 동물은 대게 겨울잠을 자는 시기. 인간은 겨울을 나기 위해 일을 한다. 힘을 내서 내년을 살아갈 준비를 한다. 사실은 매일매일 내년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오랜 시간 함께한 딸들과의 이별 준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즐거운 노후 계획을 세우려 했던 할아버지의 지난밤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는 눈물이 났다. 30년간 땅 속에서 서서히 녹슬어간 배관은 하필 그날 그 시간에 지나던 한 사람의 내일을 무참히 부숴버렸다. 너무 오래된 것은 때때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음을 모르는지.


겨울의 경계에서


너무 뜨거워서, 너무 차가워서 모두에게 힘든 밤이었다. 바꿔야 할 것은 정작 바꾸지 않고, 바꾸지 않아도 될 것은 바꿔버리는. 눈에 보이는 것은 순식간에 바꾸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한파가 찾아온다는 소식에 걸어 잠갔던 창문을 잠시 열어두고, 밖으로 나와 집 주변을 돌았다. 알싸하게 찬 공기가 코 끝을 맴돌았다. 오래된 파카를 입은 탓인지 포근한 느낌은 없었지만, 겨울이 왔다는 게 실감 났다. 단순히 시간이 흘러, 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실감 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한 해를 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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