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돈으로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지난주 코엑스에서 집으로 가던 길에 유엔 난민 기구 직원을 만났다. 그리고 내게 내전으로 인해 흩어진 시리아 난민을 도우라고 설득했다. 나라로부터 외면당한 사람들의 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누군가가 어찌 되든 큰 상관은 없었지만, 외면하거나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득하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어서 발걸음을 멈추고 서명했다.
언제부터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미세먼지 잔뜩 낀 서울의 하늘은 그날따라 유난히 뿌옜다. 나는 시리아 난민을 가슴 한편에 담을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크지 않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가려진 곳 너머는 잘 보이지도 않고 신경 쓸 겨를도 없다. 그래서 내색하기도 부끄러운 돈 몇 푼으로 내 인간 됨됨이, 그릇을 커 보이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이러한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어딘가에서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시리아 난민은 감사해할지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4~5끼를 먹을 수 있는 돈을 모아 집을 지어주고, 밥을 먹여주고, 우리나라가 4~50년대에 겪었던, 지금도 겪고 있는 열악한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돕고자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니니까.
외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외삼촌은 10년째 유니세프에 후원을 하고 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매달 일정 금액의 돈을 얼굴도 모르는 외국의 아이에게 보내고 있다. 외삼촌의 어깨에 짊어진 무게는 어머니를 위해, 아내를 위해, 자식을 위해 버는 돈만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일을 해서 번 돈을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놓는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쩌면, 힘들게 번 돈을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하는 것이 짊어진 무게를 덜어내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문득 나는 내 통장으로 들어온 월급을 생각한다. 그리고 대기업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액수로 지갑만큼이나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면서도 만원, 이만 원하는 통닭에 마음을 빼앗겨 지갑을 여는 미련한 인간을 본다. '적은 돈으로 삶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
얼마전, 약속했던 돈이 빠져나갔다. 매달 모르는 사이에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돈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갖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어딘가에서 터전을 되찾고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이 웃음 짓고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부, 오그라들지만 해볼 만하다.
*유엔 난민 기구로부터 어떤 후원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런 내용을 썼다는 것 만이라도 알아줬으면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