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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유미 Feb 07. 2019

나를 쓰게 만든 것들 3

독립출판물 <피구왕 서영> 뒷 이야기 - 3. 까만 옷을 입은 여자

성인이 된 후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다는 점에 놀라곤 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외양에 대한 이런저런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최근에는 타인의 외모나 옷차림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무례함, 혹은 ‘주책맞은 오지랖’이라는 것 정도로는 서서히 인식이 생겨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막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물론이고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서로 외모를 평가하는 소위 ‘얼평’이 하나의 문화였다. 특히 어떤 집단을 가도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는 이야기가 술자리에서는 꼭 나왔고, 신입사원들은 연수기간에 ‘여성의 화장은 비즈니스 매너다.’라고 교육받았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꽤 긴 시간 동안 면전에서 다른 이의 외양에 이런저런 참견을 하거나, 혹은 뒤에서 소고기 등급을 매기듯 집단 내 구성원들의 외모에 순위를 매기는 문화에 동참을 한 적이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 불쾌함이 치밀어 올라도 다들 모이기만 하면 외모 얘기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다른 얘기를 하자고 말하자니 분위기를 깨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심지어 한때는 외모와 옷차림을 지적하는 사람이 나를 생각해서 ‘조언’을 해주는 거라는 착각을 한적도 있다. 내 옷차림을 지적한 사람이 늘 체크남방 하나에 티셔츠, 청바지만 입고 다니는 사람이었음에도 말이다. -특정 패션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본인이 다른 사람의 패션 센스에 코칭을 시도할 정도로 여러 스타일을 고민해본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니 오해는 말자.- 이렇듯 받아들여봐야 영양가가 하나도 없을 참견에도 마음이 흔들렸을 정도로 외부에서 들이대는 잣대에 질질 끌려다녀본 경험이 있다. 


물론 타고난 성향 자체가 관심 없는 분야에는 놀라울 정도로 무딘 데다 꾸밈비로 지출하는 비용을 늘 아까워했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하든 대단한 꾸밈 노동을 했던 적은 없다. 그저 사회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을 때 교육을 받았던 대로 ‘비즈니스 매너’ 정도는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최소한의 꾸밈만 유지했다. 하지만 그 최소한의 것들만 하는데도 늘 내 기준으로는 너무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갔다. -그때는 같이 여행을 가도, 혹은 야근을 하더라도 늘 평균 삼십 분 정도는 더 잘 수 있었던 남자 친구가 부러웠다.- 게다가 사회생활을 하며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내가 닮고 싶은 아름다움의 조건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도 깨달았다. 좋은 향기, 깔끔하게 빗은 머릿결, 단정함, 배려하는 말씨와 매너, 대화할 때 지긋이 마주하는 시선, 그 눈빛이 기분 좋은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름다웠고, 그런 사람에 자꾸 눈길이 갔다.


내가 닮고 싶어 한 사람은 하나같이 자기중심이 분명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가꾸면서 타인의 외양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거나 판단하는 법이 없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을 하나둘씩 스칠 때마다 나 역시 조금씩 그들에게 스며들었다. 이렇게 닮고 싶은 사람을 만났던 시간도, 반대로 절대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던 시간도 결과적으로는 내 안에 꽤 많은 흔적을 남겼다. 닮고 싶었던 사람과 함께했던 기억, 그들에게 받았던 좋은 에너지가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첫 번째 소설집 <피구왕 서영>의 수록작인 <하이힐을 신지 않는 이유>와 <까만 옷을 입은 여자>라는 이야기가 되었다. 또 닮고 싶지 않았던 사람의 목소리, 책임을 질 수 없는 타인의 삶에 영향력만 행사하고 싶어 하는 그런 목소리를 들었던 경험은 두 개의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결국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를 들었던 시간이 글쓰기에 동기부여를 해준 셈이니 그들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이었겠지만 그들이 내 삶에 영향을 끼치고 지나간 것이다. 


두 개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통과하고 지나간 여러 목소리를 풀어내고 나니, 이제는 예전이라면 당장 자리를 떠서 도망을 가버릴법한 그런 목소리도 제법 잘 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말을 듣더라도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인 경험과 직관, 취향이 변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나니 오히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도 일단 귀를 열 수 있는 마음의 너그러움이 생긴 것 같다. 몸에 걸치고는 다녔지만 사실 불편해했던 것들을 하나둘씩 없애고 나니 소비의 범위 역시 단출해졌다. 구두, 액세서리, 가죽 가방은 버리고 좋아하는 프룻계열의 향, 단화, 천가방을 택했다.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 역시 줄어들었다. 눈 화장과 립스틱 같은 색조화장을 버리고, 옷은 자주 입는 몇 가지만 남겼다. 오래도록 곁에 놔두고 싶은 것들만 남기고 나니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내 삶의 질을 바꾸는 것에만 소비를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취향은 변하기 마련이니 또 언제 지금 택한 것들을 버리고 지금 버린 것들을 찾게 될지 모르겠지만 두 편의 이야기를 쓰며 언제고 내 마음과 취향이 변했을 때, 그때 바꾸면 된다는 단단함이 자리 잡았다. 지금 좋아하는 것들을 충분히 음미하기에도 시간이 촉박해서 벅찰 정도이니까.



이 글은 독립출판물 <피구왕 서영>의 각 단편소설을 쓰게 된 개인적인 이유를 더듬는 기록물입니다. 총 여섯 편의 소설 뒤에 있는 이야기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이번 에세이는 <하이힐을 신지 않는 이유>와 <까만 옷을 입은 여자> 두 편의 소설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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