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유미 Feb 21. 2019

기다려야 볼 수 있는 것들

샛노란 색에 홀린 듯이 이끌려 샀던 프리지아 한 단은 사흘을 채 넘기지 못하고 시들어갔다. 볼품없어진 프리지아를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뿌리 없는 식물을 또 들였다. 이제 프리지아가 있던 자리를 다른 꽃들이 차지하고 있다. 향기도 좋고, 색도 더 예쁘다. 시들해진 프리지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래 봤자 일주일도 넘기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꽃이 시들면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자리를 또 다른 꽃으로 채우는 행위는 벌써 여러 번 반복했지만 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 못하다. 손쉽게 가질 수 있는 눈앞의 행복에만 길들여진 사람이라는 걸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는 증거 같아서 꽃을 버리고 또 사는 행동은 늘 마음에 걸린다. 화병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도둑이 제 발 저리네.


장기적으로 시간을 투자하는 일에 나는 늘 인색했다. 시간은 늘 너무나 소중한 가치여서 아무렇게나 내버려둘 수가 없는 것이었다. 금방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그만두기 일쑤였다. 뭐라도 결과로 나오지 않으면 불안과 초조함에 휩싸여 참지 못하고 다른 걸 찾아다녔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는 나는 ‘티가 많이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랑 싫어하는 일을 할 때랑 결과가 눈에 띄게 달라서 어떤 것에 대한 호불호가 유난히 티가 많이 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의 점수차가 늘 많이 났었고, 그래서 담임 선생님께 잔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그래도 고쳐지지가 않았다. 전과목 골고루 다 좋은 점수를 유지하는 애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수리영역 모의고사를 풀다가 또 참지 못하고 언어영역으로 돌아가곤 했다. 수능점수는 정직했다. 내가 풀었던 문제집의 개수만큼 각 과목 별로 정직하게 등급이 나왔다. 그때부터 무의식적으로 계속 강박이 있었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해, 그래야 결과도 좋아.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 단단히 확신하고 들어간 회사에서 한 해, 두 해 생활하면서 조금씩 의문이 들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 결과가 좋았던 걸까? 사실 나는 그저 결과가 좋은 일만 좋아하고 사랑한 게 아닐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질문처럼 나한테 사실 순수한 의미에서 좋아하는 일이라는 게 있기나 했던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인정을 받거나 눈에 띄는 좋은 성과가 있을 때 쾌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시험지가 100점이면 좋아하고, 많이 틀린 날에는 울적해했던 그 시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아니 대체 교복 벗은 게 언제인데. 


시험을 치르는 학생의 마음으로 사회생활을 했었던 것 같다. 모든 일에 점수가 부여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실 회사생활은 점수를 매길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애매한 일의 총합이 아닐까. 일 년에 한 번씩 받아 드는 고과가 있기는 했지만, 매일 마주치는 동료 및 상사와의 관계, 매일 귀가 뜨거워질 때까지 통화하는 업무 관계자들과의 의사소통, 그리고 각종 모임이나 회식까지. 회사 하나에 얽힌 일이 이렇게 많은데, 하나하나에 점수를 매겨주는 사람은 없다. 또 이런 일들에 ‘좋은 결과’란 게 대체 무엇인지도 정의할 수 없다. 애초에 시험지도 없었는데 나는 백 점을 확인하지 못한다고 울적해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눈앞에 좋은 점수가 보이지 않는 것 같으니 결심은 쉬웠다. 딱 한마디로 마음을 결정하고, 쉽게 마무리했다. 시간 낭비 그만하자.


기다려야 보이는 결과도 있다는 걸 엉뚱하게도 얼마 전 면접을 보며 느꼈다. 지난 5년간 내가 했던 일을,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덜 떨렸다. 중요한 건 ‘더’가 아니라 ‘덜’인 것 같다. 더 자신 있게, 더 유능하게가 아니라, 덜 불안해하며 내 생각과 말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 적어도 내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만큼은 내 생각을 스스로 불안해하지 않는 태도, 그게 바로 시간이 해결해주는 가장 확실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내 생각을 이야기할 때마다 얼마나 형편없이 흔들렸던가. 어떤 일은 결과로 돌아오는 데에 이렇게나 시간이 걸린다.


글쓰기는 결과에 상관없이 정말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제버릇 개 못 준다고 얼마 전부터 이제는 글쓰기에 시간을 쏟는 일에 인색하게 굴고, 함부로 예단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꾸만 글쓰기에도 ROI의 잣대를 들이대고 시간을 적당히 쏟아야 한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약 5년을 한 조직에서, 하나의 분야에서 일을 한 결과 이제야 슬슬 덜 불안해하기 시작했는데 대체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무얼 바라는 건지 자꾸 핑계와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걸 5월까지 끝낼 수 있을까? (아무도 5월까지 끝내라고 하지 않았음) 내 능력으로 소설을 쓴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피구왕 서영 쓸 때도 가당치 않았음) 이제 다시 회사에 다니게 되면 글은 대체 언제 쓰지? (지금도 매일 8시간 쓰는 게 아님) 회사를 다니며 글을 쓰면 둘 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게 아닐까? (하나만 한다 해도 뭐가 되는 건 아님) 


빠른 시일 내에 좋은 결과를 봐야만 한다는 강박이 또 도져서 혼자 이리저리 변명거리를 만들어보지만 그게 다 핑계일 뿐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일단 시작한 이상 끝을 내야 후회가 없을 거라는 것,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봐야 하는 게 맞다는 건 나와의 대화를 조금만 해보아도 알 수 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개월을 들여야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쓸 수 있다. 하나의 글을 완성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고, 인내하고, 시간을 들여야만 한다. 무려 5년이나 시간을 들인 끝에 이제야 남 앞에서 내가 하는 일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글을 쓰는 나에게도 시간을 줘야만 한다. 그렇게 시간을 쌓고 또 쌓아야 덜 부끄럽게 새로운 글을 내놓을 수 있게 될 테니까. 쉽게 성취할 수 있는 것에 중독된 머리와 가슴을 해독해야 할 때다. 


꽃봉오리가 시든 프리지아 한 단은 쓰레기통에 버리는 대신 잘 묶어서 말리기 위해 생화 옆에 놔두었다. 물에 꽂아둘 수는 없게 시들었지만, 노란빛은 여전하다. 생명력이 넘치는 생화 옆에서 노란 프리지아는 조금씩 빈티지한 느낌으로 말라갈 것이다. 온전히 다 마른 프리지아는 드라이플라워로 다시 살아나겠지. 시드는 건 한순간이지만, 완전히 마를 때까지는 또 시간이 걸린다. 변화를 보려면 느긋하게 기다려줘야 한다. 프리지아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손에서 잠시 놓았던 이야기를 엮는다.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고개를 기웃거릴 때쯤 지금 붙잡고 있는 이 이야기가 정리될 수 있기를 바라며. 


차기작은 장편 소설이며, 5월에 독립출판물로 제작하려 한다. 이 한 문장을 선언(?)하기가 무서웠는데, 피하고 미루면 후회만 남는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