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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유미 Jan 29. 2019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피구왕 서영> 출간을 기념하며

얼어붙은 것들


날씨가 추워지면 수도관이 꽁꽁 얼어붙듯이 내 몸 안에서는 소화기관이 얼어붙는다. 매년 한파가 오면 소화기가 꼭 말썽을 일으킨다. 선천적으로 약간 기형적인 담관 구조 때문에 쓸개즙이 원활하게 분비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겨울이면 꼭 쓸개가 겨울잠을 자고 싶다고 시위를 하듯 몸에서 티가 날 때가 있다. 역시나 날이 추워지자 며칠 전부터 소화기가 말썽을 일으켜 속이 계속 좋지 않았다. 그런 중에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을 했으니까 상을 줘야 한다는 이유로 먹고 싶었던 빵도 마음껏 먹고, 라테는 매일 꼬박꼬박 마셔댔으니 가뜩이나 남보다 부족하게 태어났지만 이 한 몸을 살리고자 애를 쓰던 쓸개가 더는 못하겠다며 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2019년 1월 16일, 책이 나온 날도 그랬다. 대낮에 라테에 크로와상을 먹은 후 계속 속이 쓰렸고, 이제는 정말 어떤 음식이라도 섭취했다가는 쓸개가 너랑 같이 못 살겠다고 집을 나가버릴 것 같았다. 혹은 내가 배를 붙잡고 담낭을 제거해달라고 제 발로 수술실을 찾아가거나. 평소처럼 뿔이난 쓸개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꼈고, 오늘은 이 순간부터 단식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나 평범했다. 그렇게나 다를 게 없는 하루였다. 몇 달을 오롯이 바친 결과물이 세상에 나온 날이었는데도. 독립출판물을 입고했었던 독립서점 사장님들께 소식을 전하는 감사 메일도 썼다. 그런데도 별 느낌이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덤덤했다. 소화기가 꽁꽁 얼어붙더니 이제는 초심자에게는 있을 수밖에 없는 ‘열정’마저 같이 얼어버린 것일까. 뿌듯함은 이미 직접 책을 제작했을 때 다 느껴버려서 그때 좋은 감정이 다 소모된 걸까. 책이 나온 날인데 이토록 평온하다는 게 멜랑콜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생일 축하해, 서영아


저녁에는 책방에서 뜻밖의 생일상을 받았다. <피구왕 서영>의 출간, 새로운 탄생을 축하하는 조촐한 생일상. 케이크에 빵, 붕어빵, 그리고 귤까지. 내 열정과 기쁨이 이미 얼어붙은 지 오래인데 정작 다른 이들은 초에 불을 붙이고 활활 타오르는 촛불 앞에서 이제 많이 팔자는 덕담, ‘야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까 낮에만 해도 감사 메일을 발송하는 순간 ‘끝났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자리에 모인 모두가 초가 한 개 꽂힌 케이크를 둘러싸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 낮에 했던 생각과 완전히 반대되는 ‘시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다 같이 서영의 이름을 넣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서영이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이렇게 파티까지 준비되었는데 차려진 음식에 손도 대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아직도 속이 약간 쓰린데 소화기가 난리가 나지 않을까 속으로만 걱정하면서 케이크에 조심스레 손을 댔다. 한입씩 조심스레 먹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한번 얼어버린 소화기관이 해동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여전히 조금은 삐걱대긴 했지만 적어도 걱정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하게 아프지 않았다. 케이크를 계속 입에 넣고, 귤을 삼키고, 떠들었다. 잡지를 만들자고 모였지만 사실 대화의 대부분은 헛소리였다. 어디에 가서 얘기를 했다가는 아싸가 되고도 남을 것 같은 그런 이야기들. 그런 장난과 농담을 마구 던지는데 신기하게 해석이 필요하지 않았다. 주파수가 맞는 대화, 그런 대화를 했다. 쓰린 배를 부여잡고 계속 낄낄대며 계속 말했다. 여전히 배는 아픈데, 그 아픔이 꽤 견딜만했다.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왜 오늘 생각만큼 아프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혼자 빵을 먹으면 십중팔구 체한다. 혼자서 무언가를 할 때면 먹는 것마저 전투적으로 해치워버리니까. 먹는 순간까지도 그렇게 심각해서 탈이 나고 만다. 그런데 같이 먹으면, 나눠 먹으면, 그 순간만큼은 눈 앞의 사람들에게 시선이 분산되어 조금 덜 전투적인 모습으로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다. 시간을 같이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조금 덜 심각하게 만든다. 얼어붙어있던 것들이 조금씩 풀어진다. 


같이 먹는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요즘따라 더 둔해진 것 같은 쓸개를 탓하며 내일부터는 당분간 절대적으로 ‘금 카페인, 금 빵’을 실천하겠다며 다짐하고 있으니까. 문제를 같이 나눈다고 풀리는 것도 아니다. 회사에서 아무리 친구들이랑, 동료들이랑 회사 욕을 해도 변했던 게 없었던 것처럼. 아무리 <피구왕 서영>으로 빌딩 세우자고 덕담을 주고받아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갑자기 책을 많이 사서 볼 일이 없는 것처럼. 다만 같이 나누면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아프고, 더 빨리 회복된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아픔을 걱정해왔다. 속이 쓰릴까 봐 먹고 싶은 걸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이 되지 않을까 봐, 시간을 낭비할까 봐, 그렇게 허비한 시간이 나중에 나 자신을 아프게 할까 봐 걱정이 되어서 하지 못했던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피하던 음식을 먹어도 의외로 괜찮을 때가 있었고,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한 음식을 신나게 먹었을 때도 얄궂은 쓸개가 변덕을 부려 속이 쓰렸던 적이 있었다.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고, 설사 내 선택이 나를 아프게 만들더라도 단 몇 시간만 참으면 거짓말같이 또 멀쩡해진다. 성가시지만 참을 만하니까 아직까지 수술실에 뛰어가지 않은 거고. 그러니까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또 나누면 조금 덜 아플 수 있지 않을까, 아프더라도 생각보다는 빠르게 회복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더라도 누군가와 쓰린 속을 부여잡고 케이크를 나눠먹으며, 헛소리를 하고, 배가 아파도 계속 낄낄대며 웃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이 글을 쓰며 브로콜리너마저의 유자차를 들었다.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반복되는 가사가 계속 말을 걸었다. 무엇이 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애를 썼던 시간은 서영이와 함께 보내고, 다음 계절로 가면 된다고.



*글의 제목인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는 2017년에 발간된 작가 김동영의 에세이집의 제목과 동일하다. 약 5년간 다닌 회사를 그만둔 날 함께 일하던 동료가 선물해줬던 책이기도 하다. 선견지명이 있었던 친구 덕에 이 글의 제목을 바로 정할 수 있었다.

*라테와 빵을 먹지 않겠다는 다짐은 일주일도 지키지 못했다. 지금도 라테를 마시면서 이 글을 고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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