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앞에 행동은 2가지 뿐이다.
첫 소개팅을 하던 날을 떠올린다. 대학생 때였다. 여느 남정네와 다를 바 없이, 신입기자도 소싯적에는 자기애로 충만한 자신감이 있었다. 대단한 자부심은 아니었고, 그냥 ‘나정도면 잘생긴 편 아닌가?’하는 소박한 것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자(스스로 자. 自)’로 시작하는 것은 자괴감 말고는 갖고 있지 않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남자라면, 당연히 공감하겠지만, 어린 시절의 신입 기자에게 첫 소개팅이란 즉 첫 여자 친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상대로 나온 여자는 당연히 나에게 반할 것이고, 온갖 말을 쫑알거릴 것이고, 나는 은은한 웃음으로 그것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첫사랑을 시작해도 될 지를 고민해야 할 터였다. ‘스파게티’가 ‘파스타’로 바뀌던 그 시절, 우리는 나처럼 멋들어진 ‘파스타’가게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침묵이 시작됐다.
아침에 선배에게 발제를 보내고 아무런 말이 없는 선배를 마주할 때, 나는 내가 그 날의 침묵 이후로 거친 수많은 소개팅을 떠올린다. 내 자긍심 파괴의 기록이기도 한 이 기억들 속에서, 나는 다양한 형태의 침묵을 마주해야 했다. 그 앞에서 내 선택지는 많지 않다. 함께 침묵하거나(첫 소개팅처럼) 혼자 떠드는 것(두 번째 소개팅처럼)이다.
경험칙으로 봤을 때, 함께 침묵하는 것은 언제나 나쁜 결과를 불러왔다. 혼자 떠드는 것이 결코 나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시도할만 하다. 물론 그 뒷수습은 떠들기 시작한 사람의 몫으로 온전히 남게 되지만.
겁도 없이 수많은 선배 기자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써낸 주제를, 신입 기자가 다시 한 번 새롭게 재창조하겠노라고 선포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노트북을 켜 한 글자도 적지 못한 채, 다른 기자들의 재능에 질시를 보내며 시간이 흘러간다. 선배는 아마 이것까지 내다봤으리라. 잔인한 사람! 그러나 오전, 함께 침묵한 채로, 점심까지 말 없는 선배의 옥음을 기약없이 기다리기보다, “그래... 한 번 써봐...”라는 답변을 이끌어내는 것이 나았으리라. 그것만이 신입 기자의 유일한 위로였다.
한 주제로 쓰여진 수십 개의 기사를 읽고 있으면, 신입 기자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다. ‘아,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누구 기사를 따라서 썼구나’라던가, 혹은 ‘아 이 사람도 나와 같았구나’하는 동질감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물론 몇 개는 ‘와 이걸 어떻게 이렇게 썼지’ 싶은 참 기자들의 글이 보인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 연예인의 시그니처 헤어스타일처럼, 따라하면 내 나름에 맞춰 형편없어지므로 감탄만 하고 지나간다.
결국 내가 선배에게 “한 번 봐주시길 요청드립니다”하고 보내는 기사란, 여러 무난한 기사들의 부분 부분을 떼어서 구조를 만들고, 최소한의 성의마냥 내가 생각한 문장 더미가 얼기설기 합쳐진 누더기 같은 기사가 된다. 역시, 자부심은 온 데 간 데 없고 자괴감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지치기엔 이르다. 곤충이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지듯, 하루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이루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