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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ed thoughts Mar 03. 2024

109로 가는 버스

출입문 열립니다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에는 25만 평(축구장 약 116개) 넘는 땅에 100개 가까운 건물이 있다.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이동하려면 걸어서 최대 50분이 걸린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셔틀버스를 제공한다. 건물마다 로비에 스크린이 있는데그곳에 목적지와 탑승 인원수를 입력하면 배정된 셔틀버스 번호와 도착 예정 시간을 알려준다셔틀버스는 미리 예약할 수 없다. 1분 만에 탈 수도, 16분 뒤에야 올 수도 있기 때문에 바쁜 일정을 보낼 때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통근 첫차 타고 출근해서 막차로 퇴근하는 생활을 한 달째 매일 반복하고 있다. 오늘 오전 스케줄은 8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쉴 새 없이 미팅으로 꽉 차 있었다. 12시부터 1시까지 보장되어 있는 점심시간도 반은 기꺼이 내어놓아야 하는, 그런 바쁜 날이었다. 점심 미팅은 20분 늦게 끝났고, 당장 급한 일을 처리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카페테리아로 정신없이 뛰어가 쌀국수를 시켰다. 1시 반에는 내 사무실과 정반대에 있는 건물에서 미팅이 있었다. 그곳에 늦지 않게 가려면 5분 안에 밥을 먹어야 했다. 건더기만 대충 건져 먹고 또다시 뛰어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얼른 겉옷을 챙겨 입고 랩탑과 공책과 펜을 들었다. 춥고 비 오는데 갈 길이 멀기까지 하다니, 최악이었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이 피곤했다. 미팅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당일 취소는 예의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며 로비로 가 셔틀버스를 호출했다. 운이 좋게도 배정된 셔틀버스는 이미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버스가 떠나기 전에 얼른 뛰어갔다버스 안에는 기사 아저씨밖에 없었다.


 “어디 가?”

 “One-o-nine. (1-0-9요.)”

 “응?”

 안 그래도 피곤한데 대답을 반복하게 하다니, 살짝 짜증이 났다. 발음을 들어 보니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1-0-9’라는 표현을 모르나 싶어 다른 식으로 말해봤다.

 “One hundred and nine…? (백…구?)”

 “와~ 정말 먼 곳으로 가네!”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까지 먼 곳에 가는 게 맞냐고 확인하는 거였다. 내심 무시한 것이 미안해 아저씨 말에 적당히 호응했다.

 “네, 정말 멀죠.”

 “오늘 하루 어때?”

 “좋아요.”

 오히려 정반대다. 머릿속에는 ‘얼른 집에 가고 싶다. 쉬고 싶다. 잠 좀 푹 자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How are you?”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Good”이라고 대답한다. ‘Good’이 아닌 다른 대답을 하면 대화가 길어지기 때문에 생긴 습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진짜 기분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이 아니다.

 대화를 길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나의 하루를 물어봐 준 아저씨에게 뭐라도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아저씨는요?”

 “나는 진~짜 좋아! 나는 정~말 정말 행복하거든!”

 오늘 같이 지치는 날에 이렇게까지 밝은 에너지는 버겁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춥기까지 한데 어떻게 저렇게 해피하신 걸까. 신기했다. 아저씨가 나의 칙칙함에는 아랑곳 않고 싱글벙글하니 나도 약간은 기분이 풀려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목소리에 힘을 조금 더 주어 말했다.

 “진짜요? 너무 잘 됐네요!”

 아저씨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나는 이대로 조용히 목적지까지 가길 바랐다.

 “취미가 뭐야?”

 취미가 딱히 없는 나는 이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넷플릭스라고 하자니 구독하고 나서 본 영화랑 시리즈가 손에 꼽고, 골프라고 하자니 누가 끌고 가야지만 겨우 하는 게, 좋아한다고 볼 수 없다.

 “흠…. 잘 모르겠는걸요.”

 아저씨가 화들짝 놀랬다. 진심으로 걱정했다.

 “뭐? 그럼 넌 낮이고 밤이고 일만 한다는 거야?”

 아저씨는 관용적인 표현을 쓴 것 같지만 나는 문자 그대로 생각해 봤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정말 아침에도 일하고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한다. 요즘 나의 일상을 너무나도 정확히 꿰뚫어 보셨다.

 “맞는 것 같은데요…?”

 대답을 하고 나니 너무 딱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나마 최근에 글을 자주 쓰기 시작했으니 글쓰기라고 해야겠다.

 “글 쓰는 것 좋아해요. 아저씨는요?”

 “나 정원 관리 좋아해!”

 아저씨는 단숨에 대답했다. 본인의 취미를 말하고 싶은데 예의상 나한테 먼저 물은 듯이.

 “꽃 기르세요? 아니면 채소?”

 “둘 다!”

 잠깐 생각에 잠기셨다.

 “나도 글 쓰는 거 좋아해. 정원 일 하면서 꽃 보고 풀 보고 곤충 보고 흙 만지면 느끼는 게 정말 많아. 옆에 나무들 봐봐. 다 죽은 거 같지? 근데 쟤네 다 살아 있어. 삶도 그래. 지금은 잘 안 풀리는 것 같더라도 때가 와. 내가 예를 들어줄게.”

 그렇게 그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정말 힘들었어. 나는 아프리카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왔거든. 그렇다 보니까 미국의 모든 게 너무 큰 거야. 모든 건물이 이렇게나 크고, 차도 많아. 그래서 내가 한없이 작게만 느껴져. 너무 못난 사람 같아. 다시 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나 싶게 힘들었어.

 나는 대학교 정원 가꾸는 일을 했는데, 정원이 너무 심심한 거야. 그래서 꽃을 심자고 했어. 대학교는 안 된대. 꽃이 너무 비싸대. 그러다 하루는 장 보러 갔는데 꽃씨를 5불에 팔더라고. 그래서 샀어. 그리고 그걸 학교 사방에 뿌렸어. 얼마 안 돼서 곳곳에 꽃이 펴. 아름다움 그 자체였지. 대학교에서 누가 했냐고 사람을 찾아. 내가 했다고 하니 얼마 들었냐고 물어. 5불이라고 하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나는 그다음 해에 이사회에 들어가게 됐어.”

 목적지인 109동에 가까워졌다. 아저씨는 천천히 건물 앞으로 차를 몰았다.

 “이 회사가 엄청 커서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널 깔아뭉개도록 놔두지 마. 네 앞에 놓인 것, 네가 좋아하는 걸 꾸준히 하다 보면 너에게도 문이 열릴 거야.”

 아저씨는 셔틀버스의 문을 열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려다 돌아서서 물었다.

 “What’s your name, sir? (선생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선생님’으로 나름 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싶었다.

 “메이빈이야.”

 나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는 애니예요. 오늘 이야기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감사해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는 버스에서 내려 109동으로 들어갔다. 돌아가는 셔틀버스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회사의 CEO가 되고 싶었다. 아빠는 이런저런 교육을 받고 경험을 쌓다 보면 스카우트 제의가 올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스카우트보다는 사원에서 승진을 통해 CEO가 되는 걸 더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건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의 이야기다.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해 조직도를 보고 제일 먼저 한 건 나와 CEO 사이의 거리를 재는 것이었다. 내 위로 7명이 있었다. 내 바로 윗사람이 우리 회사에서만 20년 동안 일한 걸 생각하면, 한 단계씩 올라가 CEO가 되는 건 100년은 넘게 걸릴 일이었다. 큰 회사에서 일한다는 건 자랑스럽다. 하지만 20만 명이 넘는 직원 중 한 명인 나의 존재가 얼마나 먼지보다 작은지를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고생하며 좋은 대학을 졸업해 일류 기업에 입사했다고 뿌듯했는데, 둘러보면 나 같은 사람이 20만 명이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와 같은 직급에 있는 사람은 2만 명쯤, 위로는 18만 명 정도가 있겠다.

 제 살 길을 찾아 빨리빨리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일을 해내기도 벅찬데, 다들 인생의 목표를 잘도 정해서 잘도 따라간다.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나 하나씩 알아가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냉큼 찾아낸다. 생각만 많은 나를 보며 답답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갑갑하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 때도 많다.

 승진을 통해 CEO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가진 유일한 목표는 최대한 자주 승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 욕심이 많았다. 팀에서 제일 먼저 출근해 제일 늦게 퇴근했다. 밤을 새우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내가 좀 멋있었다. 하지만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일을 잘하는 것’이 같지 않다는 걸 알았다. 회사에서는 내가 밤을 새워서 일한 것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업무 시간에 끝내지 못했다며 비효율적이고 무능력하다고 평가한다.

 승진을 할 때마다 업무량과 기대치가 말도 안 되게 높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은 떨어지고, 잠을 줄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일에 쏟아붓는 시간에 비하면 승진 속도도 느렸고, 막상 승진해서 받는 보상도 기대만큼 크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승진에 매달리는 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이 한 마디씩 했다. 직장 동료들은 ‘이 팀은 너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승진을 원한다면 지금 하는 일은 쓸모없다,’ ‘회사가 가치 있어 하는 일을 빨리 찾아 나서라’며 나를 재촉했다. 회사 밖에서 만난 사람들은 ‘부동산 투자를 해라,’ ‘주식 투자를 해라,’ ‘월급은 가치가 점점 낮아진다’면서 예금 계좌에 돈을 모으고 있는 나를 한심해했다. 그렇게 나는 자꾸 작아졌고, 못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하도 주변에서 뭐라고 하니, 내가 잘못된 것 같아 들었던 조언을 시도해 봤다. 이직을 준비하려니 비자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를 벗어날 수 없었다. 회사 내에서 다른 팀을 알아봤더니 내 직급을 뽑는 곳은 거의 없었다. 주식 투자를 하려고 했더니 공부부터 해야 했고 신경 쓸 것이 많아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팀이 좋고, 지금 당장 하는 일도 재밌고, 내가 돈을 모으는 방법에도 불만이 없다. 목표를 다시 생각해 보고 목표까지 가는 방법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주변에서 하는 한 마디들이 모여 나를 벼랑 끝으로 모는 것만 같았다.

 위태롭게 버티던 중 우연히 만난 아저씨는 내 앞에 놓인 것, 내가 좋아하는 걸 꾸준히 하라고 한다. 그러면 문이 열린다고 한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도 곧 때에 맞춰 살아날 것이라고. 아저씨도 움츠러들어 있었지만 하고 싶은 걸 아저씨 방식으로 해냈다고 한다. 어쩜 그렇게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필요한 말을 해주는지.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나의 꽃은 곧 필 거라고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나에게 한소리씩 했던 사람들 모두가 좋은 마음으로 도움을 주려고 했던 건 안다. 사람들은 본인의 성공 스토리가 다른 이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라는 착각에 쉽게 빠진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방법을 모두에게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어쩔 땐 그냥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주는 게, 생판 모르는 사람이 건네주는 위로에 더 감동받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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