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았던 세상의 아주 일부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한 지 1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자유로운 출퇴근 환경 속 나만의 규칙적인 생활이 안정을 찾았다. 지난주 금요일 나는 평소처럼 일어나자마자 나갈 준비를 마치고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은 뒤 회사에 도착해 업무에 집중했다. 쉴 틈 없이 회의를 연달아하는 사이 받은 편지함엔 밴쿠버 오피스도 월요일부터 본사처럼 재택근무를 시작한다는 이메일이 도착해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피스 곳곳에는 짐을 넣어 가져 갈 수 있는 큰 상자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직원들은 원격 근무를 위해 컴퓨터 설정을 바꾸거나 모니터를 분리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본사가 재택근무를 시작한다는 소식도 꽤나 충격적이었는데, 평화롭기만 했던 밴쿠버 오피스도 들썩이는 것을 보니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큰 박스에 씁쓸함까지 안고 회사를 나섰다. 집에 도착해 짐을 푸는데 이번에는 학교에서 이메일이 왔다. 오는 월요일부터 모든 수업이 온라인 수업으로 바뀐다는 메시지였다. 드디어 코로나19가 북미권도 장악해버렸구나 싶었다. 아니, 진작 그랬는데 이제야 깨달았던 것일 수도.
주말 내내 기분도 꿀꿀한데다 코로나19가 더 이상 퍼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와 나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2층 침대 아래 책상과 벽 사이 공간이 내 세상의 전부가 되었고, 바깥세상은 SNS에 올라오는 지인들의 사진과 영상이 전부라고 믿게 되었다.
나는 과제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국 포털 사이트 새로고침 - seattle coronavirus 검색 - vancouver coronavirus 검색 - 인스타그램 피드 훑어보기'를 무한 반복했다. 기사로 호주의 마트 사재기 현장을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와 비슷한 모습을 밴쿠버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직접 찍어 올린 영상 속에서 보게 되었다. 내 바깥세상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핸드폰 화면은 밴쿠버가 지금 매우 참담한 상황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집에 먹을 것이 떨어지기도 했고, 지금 밴쿠버 상황을 우리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자 엄마와 나는 집을 나섰다. 평소답지 않게 뭘 살지 정하지도 않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무거운 짐도 거뜬하게 들기 좋은 백팩까지 챙겨나갔다. 조급한 마음으로 도착한 식료품점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SNS에서 본 텅텅 비어있는 선반은 찾기 힘들었다. 시장조사를 위해 다른 식료품점에 들렸는데 이곳 역시 크게 다른 점은 찾기 어려워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구석구석 돌아다니던 중 파스타가 가득했던 선반이 비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아주 잠깐 놀란 뒤 이를 놓칠세라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여태껏 본 평소와 다름없는 장면은 남기지 않았다는 것, 친구들은 퇴근 후 아주 늦은 시각에 식료품점에 갔다는 것, 나는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단면적인 모습만 믿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쉽게 허용한 믿음에 제멋대로 내 기분이 우울하게 내버려 둔 것 등.
타국에 오래 있었던 나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즉각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한국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것 같기도,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리워진 사람 냄새를 좇는 것 같기도, 시시각각 업데이트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헤엄치며 잡념을 흘려버리려는 것 같기도 하다. 컴퓨터나 핸드폰을 켜기만 하면(요즘은 알아서 먼저 알려주기도 한다) 넘쳐나는 정보들에 언젠가부터 올바른 정보 습득과 이해보다 얼마나 빨리, 더 많이 알고 있는지가 중요해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미디어에서 보이는 것들을 통찰 없이 온전히 받아들이고 철석같이 믿어버리는 건 굉장히 위험한 짓이다.
카네기멜론대학교의 첫 수업에서 교수님은 Computer Science라는 전공을 선택한 학생들에게 훌륭한 말씀을 해주셨다. "여태껏 그래 왔듯이 컴퓨터는 앞으로의 세상에도 큰 영향력을 가질 것이 분명한데 여러분은 이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세상의 움직임을 이끌어나갈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한창 전공 선택에 의문을 품고 있던 때 내게 강력한 확신을 준 한 방이었다.
타인에 의해 내 의사가 결정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어쩜 그렇게 쉽게 수용해버렸는지 모르겠다. 여기저기 마음이 끌려가도록 내버려 둔 나를 반성하게 되는 오늘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다들 많이 사간 파스타를 저녁으로 먹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