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록 2/2
밤이 다 되어 체크인을 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내 울음은 R의 차에 올라타자 멈추었다. 분노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날씨였다. 슬프기에도 어울리지 않았고.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서 어딘가 무섭기까지 했던 호주의 대자연에 압도되어 내 고민과 상처가 별것 아닌 체 할 수 있었다. [여행의 이유](김영하 작가님의 책)에서의 호텔처럼, R의 멤버십 호텔의 방 안에는 생활의 상처가 없었다. 연식이 꽤나 있어 보이는 호텔이었지만 스쳐간 그 누구의 생활의 흔적도 없었기에 깨끗하고 쾌적했다. 넓은 베란다 넘어엔 너른 바다가 시커멓게 보였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잊고 있었던 내 분노와 슬픔으로 뒤엉킨 울음이 얼굴을 바꾸고 다시 올라온 건 누구의 상처도 없는 호텔 방에 들어섰을 때, 그때쯤이었다. 불안과 죄책감의 얼굴을 하고.
밤이 늦도록 그가 말했던 결제는 처리되지 않았고 대신 내 2주 치 주급이 들어와 있었다. 한시름이 놓였다. 내일 필요한 여행경비 그러니까 먹고 마시는 비용은 해결이 되었다. 오늘 먹고 마신 것도 R에게 이체해 줄 수 있다.
'그는 밥을 먹었을까.'
빈속에 마른 담배만 피워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담배도 다 태워 더 이상 피워댈 담배도 없어 더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밤이 되니 이 순간 가장 외롭고 힘들 사람이 누군지 명확해지는 것 같았다. 온전히 뒤집어쓴 자기 원망만큼 비참한 게 있을까. 탓할 사람이 있다는 최후의 보루가 내겐 있고 그에겐 없다. 불현듯 그가 혹시나 나를 두고 먼저 가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밀려왔다. 매일 죽어버리고 싶었다고 절망의 눈으로 소리치던 며칠 전의 취한 그가 떠올랐다.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낯선 호텔방에 앉아 있는 나를 덮쳤다.
그가 정말 그렇게 해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모질었나, 내가 너무 몰아세웠나, 일이 이렇게 된 데에 내 탓이 없다고 할 수가 있나, 방관하지 않았던가. 그의 생사를 확인해야 한다. 밥 먹었는지 물어볼까, 고양이 밥은 주었느냐 물어볼까...
다정하게 생사여부를 확인해도 될 일을 굳이 독한 말로 결제는 정말 해줬다고 하드냐 닦달하며 문자를 보냈다. 답장이 왔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순간 미워서, 미안했다. 미안하지만, 미웠다.
이 와중에도 여행 약속을 깨지 않았던 것은 이미 몇 달 전에 계획된 것이고, 친구의 호의를 무시하기 싫었던 이유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잊어버리고 싶었다.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동안 그와 나 사이의 공기는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말라버렸다. 그 말라비틀어진 공기를 공유하는 것조차 괴로웠다. 그를 향한 원망으로 가득 찬 나는 그의 모든 결정과 행위에 분노했다.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해 돈을 빌리던 날의 내 마음이, 우는 나를 듣고 울음을 참던 엄마의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았다. 그런 아프고 슬픈 마음으로 이 작은 집에서 평소처럼 그와 공간을 나눠 쓰고 공기를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숨 막히는 일인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남편의 무능을 돌려까며 이 생활이 싫다고 울었다. 여행을 가겠다는 내 이기심에 대한 변명 같은 거였다.
그렇게 나는 내 생활의 상처 덩어리에서 120km쯤 도망쳐 있었다. 하지만 그 덩어리들은 대낮의 해를 피해 그림자로 숨어들어있었을 뿐 밤이 되자 모두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누구의 생활의 흔적도 없던 그 호텔방을 가득 메워버렸다. 고속도로를 아무리 달려도 떨어지지 않고 들러붙어 온 내 생활의 상처는 여행 내내 무겁게 나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걷는 걸음걸음이 평소보다 무거웠고 눈으로 쏟아지는 풍광이 평소보다 시렸다. 돌아가야 하는 곳이 더 무겁고 시린 그와 나의 공간이라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그를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할까, 여행으로 3일이 흘렀고 당장 목 앞에 겨눠져 있던 칼날은 비켜냈다 (그가 기다리던 결제는 처리되어야 했던 금액에 훨씬 모자라게 다음날 처리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만큼 다른 칼날이 제 날짜를 찾아오고 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도 없고 아무런 채로 살 수도 없을 거 같다.
(img ref:Pixabay로부터 입수된 Free-Photos님의 이미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