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지향 - 번외
아들이란
와이프와 나는 원래 딸을 원했다. 결과적으로 아들이 생겼다. 와이프는 처음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지금은 그런 기색조차 없다. 다만 둘째는 내심 딸이었으면 하는 눈치다. 나는 이제 둘째를 낳더라도 아들이었으면 하고 있다. 14개월 차에 접어든 아들을 주양육자로서 키워 본 입장에서, 아들은 먹이기, 재우기, 씻기기, 입히기 등 모든 면에서 수월했다. 앞으로 아들이 살아갈 세상을 고려해보더라도, 딸보다는 아들이 조금 더 마음이 놓인다는 이해타산도 있다. 그렇다고 특정 성별이 더 낫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빠 입장에서 아들이 다치더라도 조금 덜 가슴 아플 것 같다는, 성급한 예측일 뿐이다. 또한 동성의 자식과 육체적으로 함께 놀 수 있다는 점은 다양한 놀이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 관점에서, 아들은 나에게 좀 더 맞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첫 ○○의 벅참
아이가 태어나 한 모든 것들의 ‘첫’ 순간을 옆에서 볼 수 있어 행복했다. 복에 겨워 벅차기까지 했다. 누군가 육아휴직을 언제 쓰는 것이 가장 좋으냐고 묻는다면, 가장 많은 '처음'을 함께할 수 있는 ‘태어난 직후’를 추천하고 싶다. 50일쯤 되면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100일이 넘으면 목을 가누기 시작한다. 6개월이 지나면 포복을 하고, 1년이면 걷기 시작한다. 다만 우리 아들은 조금 빨라서 10개월 차부터 한 걸음씩 걷더니, 돌잡이 무렵부터는 살짝 뛰기 시작했다. 키도 상위 5% 수준으로 또래보다 컸다. 또래보다 1~2개월 정도 빠르게 성장하며 벅참을 느꼈다. 언제 크려나 했는데, 어느새 또래보다 커 있는 걸 보며 ‘벌써 이렇게 컸나’ 싶기도 하다. 아이는 언제나 내 예상보다 빨리 커 있다. 그래서 첫 순간의 벅참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육아휴직 1년
아들을 키우면서 8~10개월 차가 가장 큰 고비였다. 이유식을 시작하고, 낮잠이 점차 줄어들며 ‘강성울음’이 생겨났고, 활동량도 늘어나며 육체적으로 힘들어졌다.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건 강성울음이었다. 그 다음은 식사였다. 예측이 힘들고, 원인을 찾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내가 뭘 잘못해서 아이가 힘든가?” 하는 죄책감이 컸다. 그러나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 다만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며 아이에게 맞는 대안을 찾아가고, 울음에 의연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상황은 침착하게 넘길 수 있게 됐다. 둘이서 본가인 양양에도 몇 번 다녀오고, 서울 시내 아쿠아리움이나 마트에도 나갔다. 최근엔 와이프와 함께 첫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1년이란 시간 동안 아이에게 익숙해질 수 있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후회 없는 1년이었다.
둘째에 대한 고민
앞서 둘째에 대해 언급하긴 했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둘째를 갖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원래 아이를 갖는다는 건 경제적 고려를 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권도 바뀌었으니 아이 키우기 더 좋은 정책들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다. 당분간은 와이프가 육아에 전념하고 싶어 하기에, 내가 잘만 하면 둘째를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 마련될 것 같다. 다만 유산이나 건강 문제 등, 첫째 때는 겪지 않았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변수들에 대한 걱정도 있다. 하지만 그런 통제 불가능한 변수까지 염려하는 건 소모적이다. 좋은 생각, 긍정적인 미래만 생각하기에도 부족한 세상이다.
부성애란
부모가 되고 나서 매일 되새기는 문장이 있다.
“아이에게 뭘 해주려고 하지 마라. 귀찮아하지 마라.”
아이를 귀찮아하게 되면 부모의 대체자들이 생겨나고, 부모-자식 관계는 왜곡될 수 있다. 얼마 전 숏츠 영상에서 본 충격적인 이야기—대치동 부모들은 아이를 직접 돌보지 않는다고 한다. 오로지 학원 뺑뺑이만 돌린다. 결국 돈으로 아이를 키우고 돌봄을 외주화하는 것이 정말 건강한 방식인가 의문이 들었다. 그런 부모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성애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귀찮아하지 않고, 더 많은 시간과 사랑을 나누려 애쓰는 것이 부성애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아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육아휴직’이라는 고된 ‘이직’
육아휴직이 주는 고마움과 동시에 죄책감이 있다. 그보다 먼저, ‘육아휴직’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무책임한 뉘앙스가 문제다. 이건 결코 ‘휴직’이 아니다. 오히려 ‘육아이직’이라 불러야 맞다. 복직 후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육아가 힘들어요? 일하는 게 힘들어요?”였다. 나는 한결같이 ‘육아가 더 힘들다’고 대답했다. 이 말인즉, 육아는 직장 업무보다 더 고도화된 정신적·육체적 노동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휴직’이라는 단어로 폄하되는 것은 부당하다. 더 많은 아빠들이 ‘육아이직’을 통해 진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