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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ho Jul 22. 2019

#4. 극한이 짜내 주는 힘

101번 글쓰기

산티아고 순례길: 구리에소 ~ 궤메스 (약 40km)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북쪽길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우선, 북쪽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북쪽길은 오래전 아랍 세력에게 이베리아 반도가 점령당했을 때 반도 북부의 해안과 산지에 생겨난 비밀 루트가 지금의 북쪽길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런 북쪽길은 북쪽길은 대서양을 끼고 있어 내가 걷던 계절이 여름이었음에도 선선한 날들이 이어졌었다. 그런데 유독 빌바오 이후 날씨는 무척이나 더워졌다. 순례길 초기이기도 했고, 아직 체력이 정상궤도에 오르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고 다음 목적지의 중간쯤에 위치한 구리에소에서 하루를 머물기로 했다. 구리에소는 순례자들이 잘 찾지 않는 탓에 알베르게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구리에소에 도착하고 2시간 후에야 알베르게 관리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직 순례자를 맞지도 않은 것 같은 내부는 먼지와 거미줄이 있어 나를 포함한 몇몇의 순례자들을 당황케 했다. 더 불행한 것은 근처에 바르가 단 하나밖에 없었고, 편의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구리에소에서 하루를 버텼다. 보통 알베르게에서 편히 쉬었다고 표현할 텐데, 많이 이들이 찾지 않는 곳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경험하고서야 알게 되었으니 나는 참 시종일관 어리석다.


구리에소에서는 일찌감치 나섰다. 구글맵을 켜고 노란 화살표를 따라 잘 걸어갔다. 그런데 구글맵과 노란 화살표가 어긋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노란 화살표를 관리한 스페인인들에 대한 원인모를 믿음이 생겼다. 구글맵은 잠시 꺼두고 노란 화살표만 따라갔다. 조금 가다 보니 가파른 구릉지대가 나왔다. 그러려니 했다. 방목한 염소들이 옆에서 위험하게 뛰 다니고 있었다. 조금 불안해졌다. 우거진 덤불들 사이로 기암괴석이 드러났다. 굉장히 불안해졌다. 기암괴석들에는 노란 화살표가 선명했다. 무작정 따라갔다. 경사는 점점 더 가파르고, 주변에는 인기척도 없었다. 더군다나 전날 덥고 화창했던 날씨는 안개가 겹겹이 내려앉아 가시거리가 3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수풀 사이 군데군데 표시된 노란 화살표만 따라갔다. 그렇게 점점 더 높은 곳으로 가게 되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걷다가 보니 내가 돌산의 꼭대기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내 뒤는 정말로 천 길 낭떠러지만 있었다. 마치 설악산 울산바위 등산코스를 벗어나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오금이 저렸고, 순간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자 내가 얼마나 높은 곳에 올라왔는지 실감이 났다. 저 위 사진에서 보이는 돌산의 꼭대기에 서 있던 것이다. 정신 못 차릴 만큼 겁이 났다. 이제 정말 꼼짝없이 죽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순례길에서 죽은 최초의 한국인이 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아직 이룬 것도 없고, 한국에 두고 온 여자친구 생각도 났다. 여자친구 생각이 나니깐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렇다고 돌아온 길을 도로 내려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짊어진 배낭의 무게와 부피를 생각하면 좁고 가파른 길을 다시 내려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조금이나마 경사가 완만한 곳을 탐색해 발을 내디뎠다. 수풀과 기암괴석이 곳곳에 함정을 파둔 듯 딛는 곳마다 발목이 꺾이며 빠져버렸다. 다행히 삐거나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 정신이 바짝 드니 몸이 알아서 각성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그 돌산을 내려왔다. 걷는다기 보다는 가방을 썰매 삼아 미끄려져 내려왔던 것 같다. 가방에는 노트북도 있었는데 옷으로 잘 감싼 덕에 멀쩡했다. 극한의 상황이 해결되고 시계를 보니 3시간이 지나버렸다.


극한의 힘 짜내기

극한의 상황을 벗어나니 온 몸의 긴장이 풀렸다. 짐을 모두 내려놓고 300ml 물을 한 번에 들이마셨다. 그대로 퍼져 버리고만 싶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가능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만 무리해서 가면 산티아고 북쪽길에서 오아시스로 유명한 궤메스라는 작은 마을의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금 무리한 거리는 40km였고, 아직까지 시도해 보지 못한 거리였다. 정말 죽을힘을 다해 걸었다. 그렇게 10시간 남짓을 걷고 있으니 북쪽길의 오아시스 궤메스에 당도할 수 있었다. 아래 사진과 같이 많은 인파 속에서 안전하게 합류할 수 있었다.


극한의 상황을 겪으며 느낀 점은

첫 번째, 극한의 상황이 닥치면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몰려온다.

두 번째, 그러나 죽지 않고 극한의 힘을 짜내 생존한다.

세 번째, 그 경험이 삶의 동력이 된다.


죽을 것 같을 때는 죽지 않는다. 극한의 힘을 짜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10시간을 걸어 도착한 궤메스의 알베르게 모습(2017)


순례길 정보 참고 사이트

http://www.alberguescaminosantiago.com/camino-del-norte/alberg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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