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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ho Jul 27. 2019

#5. 신이라는 이름의 행복

101번 글쓰기

산티아고 순례길(북쪽길): 도노스티아 ~ 오리오(16.03km)


도노스티아의 아름다움을 뒤로하다

불과 12시간 전에는 프랑스 파리였는데, 12시간 후에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인근의 바욘이라는 곳에 서 있었다. 파리에서 밤 10시에 출발해 바욘에 도착하니 이슬 내린 아침이었다. Flex Bus를 타고 7시간 정도 이동한 것 같다. 묵직한 피로감에 바욘에서 순례자 카드를 받고서 도노스티아까지 버스를 타고 말았다. 한 달 동안 걸을 예정이었으니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준비운동도 없이 그냥 하고 싶다고 순례길에 왔으니 무작정 걸을 체력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버스를 타서 도노스티아, 스페인 미식의 도시에 도착했다. 생전 처음 보는 고귀한 광경이었다. 옥색의 강과 바다, 정말 청명하다 못해 계곡물만큼이나 맑은 하늘, 고풍스러운 건축물들.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에 도노스티아에 눌러앉을 뻔했다.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셀 수 도 없이 많은 걸음이 남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도노스티아의 광경은 의식적으로 무시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걸으니 도심을 빠져나와 산길이 나왔다. 산길을 걷다 보니 봉우리 같은 곳에 올라서게 됐다. 도노스티아가 한눈에 들어왔고, 정말이지 다시 올 때는 시간과 돈을 여유 있게 준비해서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도노스티아의 풍경1(2017)
도노스티아의 풍겨2(2017)
도노스티아 베스트 컷(2017)
Camino Del Norte 1


고비마다 놓여있던 막대기

아름다운 도노스티아를 조금 벗어나니 산악지대가 계속 이어졌다. 한국에서 별다른 운동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몸은 금방 방전이 되었다. 더군다나 가방에는 한 달 치 짐이 한가득이었다. 일단 집에서 버릴 옷을 죄다 챙겨 왔기 때문에 옷 무게도 만만치 않았고, 걷는 도중에 수강신청도 해야 했기 때문에 노트북도 있었다. 순례길 책과 스페인어 책도 있었고, 혹시 몰라 친구에게 받은 작은 텐트도 하나 있었다. 그야말로 가방에는 작은 살림이 통째로 들어있었다. 그런 가방까지 메고 걸으니 초행자로서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것 같다. 시작하자마자 고비가 몰려온 것 같아, 먼 타국에서 까지 이렇게 고생해야 하나 싶었다. 그리고 등산 스틱이나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갔을까, 곧고 손에 쥐기 알맞은 굵기의 나무 막대기가 하나 있었다. 마치 누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두었나 싶을 만큼 깔끔한 나무 막대기였다. 다리가 두 개에서 세 개가 되는 순간이었다. 오르막길에서도 유용했고, 내리막길에서도 유용했다. 배낭이 무거워 잠시 쉴 때도 허리만 잠시 숙여 막대기에 의지하면 그럭저럭 쉴만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도구가 생긴 것이다.


이후에도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체력적 고비 때마다 내 앞에는 나무 막대기가 놓여있었다. 실제로 누군가 가져다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오랜 걸음으로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내겐 최소한 선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순례길이니 만큼 우리가 신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종교를 믿지 않고 살았다. 오히려 종교를 싫어했다. 사랑을 가르치면서, 각 종교들은 서로를 흠집 내고, 헐뜯고, 심지어 전쟁도 불사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런 탓에 신이라는 존재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순례길을 걷게 된 것은 내 젊음에 고생한 줄 새겨볼까 싶어서였는데, 이런 식으로 막대기가 놓여있으니 신이라는 존재가 진짜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 궁금해졌다.



신이라고 불리는 행복이라는 의미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마주한 사람은 인류 역사상 없다고 본다. 가끔 귀신을 본 사람이나 신점을 보는 무당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대중적으로 생각하는 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은 인류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힘쓰고 인류가 더 나은 삶을 살기 바란다고 전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신의 역할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감정, 행복이 대신해주고 있지 않나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의 크기에 대한 이론은 없지만 흔히 작은 행복, 큰 행복 등으로 행복의 크기를 나누곤 하는데, 이것은 삶에서 오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들에서 행복이 전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순례길에서 마주한 나무 막대기, 그것이 주었던 작은 행복이 내게는 신이 주는 선물 같았다. 그러나 신은 없고 행복이라는 감정은 이었다. 그렇다면 신이라는 존재는 행복이라는 감정으로도 존재하는 것 아닐까? 신과 행복이 같은 의미, 같은 존재는 아닐까?


순례길을 걸으면서 개똥 같은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나'에 대한 불안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대학교 4학년은 취업을 해야만 하는 존재다. 행복은 조금 뒤 전에 물리고 현실에 집중해야만 한다. 그럴 때, 작은 행복이 주는 따스함을 지금 와서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때의 감정, 상황, 기억이 뭔가 특별하게만 느껴진다. 작은 막대기 덕분에 삶이 행복해졌다면 누가 믿겠냐마느 최소한 나에게 순례길에서 손에 꽉쥐었었던 막대기들은 행복을 주었었다. 마치 누군가 준비해둔 선물 같이.


신을 멀리서 찾지 말자. 행복 역시 멀리서 찾지 말자. 언제나 곁에 두고 몰라봤던 것들에서 찾자. 오늘은 언제나 처음이니까. 그래서 일상이 특별하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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