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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ho Jun 01. 2020

#10.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모

101번 글쓰기

32년 생과 92년 생 잔나비 띠


2월 어느날, 퇴근시간 즈음 엄마한테 전화가 왔었다. 평소라면 전화 올 시간이 아니었는데,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전화를 받기도 전 부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보세요?"
"민호야, 할아버지 돌아가셨데.."

엄마는 단어 하나 마다 눈물을 가득젹셔 말씀하셨다.


준비하지 못한 채 할아버지가 떠나가셨다. 그래서 할아버지 생전에 해주셨던 말씀, 기억을 더듬어 기록해본다.


#1932년

8월 5일 이북의 황해도 해주시 송화군 연방면 방림리에서 8남매 둘째로 태어나셨다. 92년에 태어난 나와는 딱 60년 차이가 나신다.


#국민학교

외할아버지가 태어났을 당시는 일제시대였기 때문에 국민학교를 다니며 일어와 사상교육을 받으셨다고 한다. 생전에 할아버지 말로는 카미카제에 지원할 뻔 했다며, 그만큼 일제의 사상교육이 강력했다고 하셨다. 그러나 청소년기에는 정신 바짝 차려서 공산당에서 벗어나 자유대한민국 편에서 싸우셨다고 한다. 이데올로기가 휘몰아친 외할아버지의 유년~청소년기 였다.


#6.25

외할아버지가 중학교에 진학하실 즈음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할아버지는 공산당이 싫어서 홀로 남쪽에 내려와 학도병이 되셨다고 했다. 고조할머님께는 잠시 남쪽에 다녀올테니 걱정마시라고 하셨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국군이 북진했을 때, 고조할머니를 다시 뵈었는데 그게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뵌 마지막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고아가 되실 줄은 모르셨다고 하셨다. 그 후 1.4후퇴 때 고무보트 타고 백령도를 거쳐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셨다고 했다. 전쟁으로 손가락 하나와 발목뼈 함몰이라는 상처를 평생 새기고 사셨다. 무엇보다 고아라는 것이 제일 아프셨을 것 같지만..


#양구

할아버지는 양구에서 1사단의 일원으로 참전하셨는데, 그 때 워낙 전황이 불리해서 매일 같이 전우를 잃었다고 하셨다. 한 번은 소대원 30명과 야간기습을 감행했는데, 동이 트니 할아버지를 포함해 4명 정도만 살아있었다고 했다. 할아버지 세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도저히 나는 엄두가 안 나는 삶이라는 생각 뿐이다.


#공비토벌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전라도쪽 후방부대에 배치되어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하셨다고 한다. 한 번은 주민들이 뒷산에 공비가 있다고 제보하여 소대가 야산을 수색했는데, 제보 자체가 공비들의 계략이었다고 한다. 소대장은 죽고 할아버지를 포함해 몇몇만 살아서 부대로 복귀했다고 하셨다.


#손가락

할아버지는 참전 1년 만에 치명상을 입고 부산으로 이송되어 치료 후 상이군인 제대를 하셨다. 손가락 하나를 잃으셨고 복숭아 뼈에 포탄 파편이 박힌 채로 평생을 사셨다.


#대학생

그 시절에 중학교까지 다니실 정도면 공부는 곧잘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직후 검정고시를 보시고 한양대 전기공학과에 진학하셨다. 그 때 혜화동 상이군인촌에 계시면서 학교를 다니셨다고 한다. 그 때 한양대 교수 중에 박목월 선생이 계셔서 그 분 강의를 들었던게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다. 한양대는 1년만 다니시고 홍익대 신문방송학과라 편입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문과생 이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종종 대학교 졸업사진을 보여주셨는데 꽤나 댄디보이 셔서 놀랐다. 키가 180 정도 되셨으니 당시에는 인기가 많으셨다고 한다.


#기자

홍대 신방과를 다니면서 부터 교내 기자단 생활을 하셨고 졸업 후에도 기자생홯을 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나 하셨고, 어디서 기자생활을 하셨는지는 말해주신 적은 없다.


#결혼

할아버지는 대학교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할머니를 소개 받았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이북 평안도 부잣집 출신이셔서 선자리 주선도 많았는데 할아버지와 결혼하셨다고 한다. 혼자 남한에 내려와서 대학까지 나온 성실함도 결혼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는데, 무엇보다 시댁이 없는게 제일 큰 이유였다고 하셨다. 그 때도 시댁은 결혼의 큰 이유였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결혼 후에 의정부에 터를 잡으셨는데, 지금의 집을 직접 설계하시고 지으셨다고 한다. 집이 대로변에 있는데, 한 번은 자동차가 들이 받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자동차는 다 망가졌는데 집은 온전했다고 한다.


#세계여행

할아버지는 동년배들에 비해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신 편이시다. 소련, 블란서, 아메리카 등

원래 할아버지 꿈은 해외 특파원이었다고 한다.


#친구

대학을 나온 할아버지의 친구들은 당시 잘나가는 관료, 사업가, 교수, 단체장 등이었다고 한다. 당시 의정부에는 차가 거의 없었는데, 돌잔치 할 때마다 할아버지 집 앞에는 자동차들이 줄 서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지금도 그 친구들이 도와준 것들 반만 받았어도 지금 보다 훨씬 부자였을 거라고 아쉬워 하신다.


#자식

할아버지는 슬하에 장녀, 차녀, 장남. 총 삼남매를 두셨고 그 삼남매는 모두 결혼해 총 7명의 손자들을 낳았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손녀를 보신 적이 없었다.


#등산

할아버지는 전국팔도의 산을 모두 오르셨다. 한중수교 이후에는 백두산도 올라가셨다. 단순히 등산만 하신 건 아니다. 더덕, 도라지, 하수오 같은 약초들도 캐셨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임산물 채취에 대한 제재가 심하진 않았다고 한다.


#손

할아버지는 산을 다니시며 온갖 나물과 과일을 채집하셨다. 나물은 손맛으로 무쳐 내셨고, 과일은 술을 담가 드셨다. 집안 정리하며 할아버지가 담그신 술을 정리했는데 보통이 20년 이상 된 약주였다. 두고두고 아껴 먹을 계획이다. 종종 할아버지는 두부도 만드셨고, 메주도 쑤셨다. 장도 직접 만드셨다. 이제는 할아버지 손맛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최애탬

할아버지는 원형탈모가 있으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외출하실 때는 보통 모자를 쓰셨다. 할아버지는 키가 180 정도 되셨다. 그런 분이 항상 모자로 헌팅캡을 쓰셨는데 꽤나 멋쟁이 셨다. 거기에 주머니가 여러개 달린 조끼도 항상 입으셨다. 스위스나이트도 항상 지참하셨다.


#시장

할아버지는 짠돌이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밖에 나가서는 웬만해서는 돈을 쓰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의정부에 있으면, 항상 시장에 가서 장을 보시고 붕어빵도 사다주시고, 맥도날드 햄버거도 사오셨다. 할아버지가 쓰러진 3년 전 부터는 할아버지는 시장에 가보질 못하셨다. 많이 답답하셨을테다.


#북한말투

큰변 난다. 할아버지는 큰일 난다는 말을 항상 큰변난다고 하셨다.


#성격

할아버지는 남한테 빚지는 걸 제일 싫어하셨다. 휴지 한 장도 아끼고 아껴 쓰신 자린고비 셨다. 10대에 전쟁으로 고아가 되시면서 성격이 생존전략이 되신 것 같다. 군대에서 담배를 배워 매일 한 갑 가까이를 태우셨는데, 동기한테 담배 한 가치 얻어피자고 했다가 "그지냐?"고 비아냥 대는 동기한테 화가나서 그 날로 담배를 끊으셨다고 한다. 선한 성격은 결코 아니셨던 것 같다.


#이북가족

할아버지는 8남매셨는데, 이남으로 넘어 온 형제는 없다고 하셨다. 유일한 혈족은 5촌 한 분 계셨다. 의아하지만 이산가족 상봉신청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가족은 미치도록 보고 싶지만 혹시라도 자기 만나고 불이익 볼까, 만나더라도 같이 살지도 못하니 가슴만 더 아플 거라며 아예 잊고 사신다고 했다. 저승에서는 가족분들을 뵙고 있지 않을까..



어느날 갑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진짜 돌아가셨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이야기를 더할 수 없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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