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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ho Feb 16. 2021

#36. 구리에소

101번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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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독이 해소되는 작은 마을


산티아고 길을 걸은지 딱 일주일이 되었던 날이었다. 빌바오를 떠나 포베냐라는 작은 동네의 알베르게에서 하루를 자고 일어났다. 별다른 준비 없이 젊음의 체력과 신체만 믿고 걸었던 탓일까. 몸이 방전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걸음을 멈출 수는 없으니 하는 수 없이 길을 재촉했다.



그날 따라 어찌나 힘든지 별로 가지도 않았는데, 사설 알베르게라도 나오면 천 번, 만 번 속으로 고민을 했다. '차라리 여기서 쉬다 갈까?'


속으로 고민만 하다가 하나, 둘 사설 알베르게를 지나치니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렇게 걷다 보니 다음 목적지인 궤메스까지는 한참이고 오후 시간대에 접어들었다. 오늘은 이쯤하자 싶어 구리에소에 있는 알베르게로 가는 샛길로 빠졌다. 언듯보면 양평이나 포천의 유원지 같은 풍경이었다. 큰 다리 아래 개울이 흘렀고, 인도라고는 따로 없지만 그럴 만도 한게 차들도 많이 없었다. 그나마 지나다니는 차들도 다 SUV나 공사차량이었다.


구리에소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마을 주민이 관리하는 곳이라서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문을 여는 시간이 된다는 안내판이 있었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마을 주민이 와서 문을 열어줬다. 들어가 보니 잘 관리 되지 못한채 먼지가 쌓인 2층 침대들이 있었다. 몸을 쉽게 눕히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일단 여독을 풀기 위해 편한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리고 알베르게 뒤편에 있는 개울 구경을 갔는데, 다른 순례자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내성적인 편이라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는 못했는데 그들 근처에 앉아 맨발을 개울에 담갔다. 시원했다. 개울 근처에 있는 활엽수 나무 그늘 아래서 눈을 감고 발의 차가움과 그늘의 시원함을 만끽했다. 일주일의 여독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 생각없이 한시간 정도 앉아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허기를 달래려 근처 BAR를 찾아갔다. 근처를 왕래하는 장사꾼들, 오토바이 타는 라이더들, 근처 동네 주민들이 북적였다. 시에스타가 막 끝난 시간이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구석쯤에 자리를 잡고 맥주와 스페인식 오믈렛을 시켰다. 청량한 맥주와 담백한 오믈렛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찍었던 사진과 일기를 정리했다. 여태 혼자였지만 비로소 진짜 혼자가 된 홀가분함을 느꼈다.



북쪽길을 걸었던 사람들에게도 구리에소가 익숙한 지명은 아닐 것이다. 풍경이 좋은 곳도 아니고 특별히 할 것이 있는 곳도 아니다. 순례자 코스에서 약간 빗겨난 곳에 있는 어쩌면 외딴 곳인데. 그곳이 참 기억에 남는다. 그곳에 향하는 길도 좋았고, 그곳에서 무료하게 있던 시간도 좋았다.


이제 퇴근을 하려고 하는데, 문득 그곳에서의 모멘토가 생각났다. 무료하게 지내고 싶다. 하염없이 무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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