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ypho Feb 23. 2021

#40. 세익사스

101번 글쓰기

부락 같은 동네 세익사스
산티아고에 이르기 직전 여러 갈래의 순례길이 만나는 페드로소우라는 동네가 있다. 프리미티보를 걷다가 그 동네 직전에 세익사스라는 BAR 하나 정도 밖에 없는 부락 같은 동네 세익사스에 도착했다.


굴곡진 북쪽길을 지나 천년 동안 유지되었을 만큼 지형이 험난한 프리미티보의 막바지에 만난 세익사르라는 동네는 사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정말 정말 작은 동네였다. 생각보다 일정이 2~3일 당겨져서 무리하지 않기 위해 이 동네에 엉덩이를 무겁게 했다.


이 작은 동네에 조금 이르게 도착하니 알베르게는 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3시간 내에 한 두명씩 도착하더니 10명 만실인 알베르게가 꽉 찼다. 나 바로 다음에 도착한 노르웨이 아저씨와 어떻게 이야기를 터서 함께 BAR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항공기 정비사 노르웨이 아저씨
50살 조금 넘었다고 한 이 아저씨의 직업은 노르웨이에 주둔한 미공군 전투기, 수송기를 수리하는 엔지니어였다. 노르웨이에도 미군이 주둔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미군이 노르웨이에 주둔한 이유는 노르웨이가 러시아와 인접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번은 근무하고 있는데 러시아 군용기가 러시아 영공을 침범해서 미군기가 경고비행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세상은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은퇴를 하고 계약직 같은 형태로 여전히 미군 부대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데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왔다가 가족은 바스크의 도노스티아에 머물고 있고, 아저씨는 거기서 부터 북쪽길을 걸어 산티아고를 가고 있다고 했다. 산티아고까지 간 다음에 근처 공항에서 다시 도노스티아로 돌아가 가족과 만나 노르웨이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와이프가 싫어했지만 와이프는 같이 걸을 생각이 없어서 혼자 걸었다고 했다. 돌아가면 지금 보다 더 와이프에게 잘해야 한다는 근심어린 그 아저씨의 표정이 잊혀지질 않는다.

로컬들과의 저녁식사

노르웨이 아저씨와 BAR에서 점심을 먹고 숙소에 들어와 한숨 자고 일어나니 날이 선선해졌다. 그리고 배가 고파왔다. BAR는 이미 문을 닫았고, 근처에 매점이나 마트도 없었는데 알베르게 옆에 밴딩머신이 딱 하나 있었다. 음료, 맥주와 생선 통조림, 햄 등이 있어서 가지고 다니던 빵과 생선 통조림, 맥주를 뽑아 벤딩머신 앞 식탁에서 저녁을 차렸다. 그러다 알베르게에 느즈막하게 도착한 로컬 아줌마 아저씨들과 합석하게 됐는데, 그들이 나눠준 음식으로 배부르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해줬던 얘기는 "너 참 용감하다."였다. 생전 처음 들어봤던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용감'이란 단어가 적용 된 것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워낙 겁이 많아 무서운 영화는 물론 FPS도 못하는데 그들 눈에는 나의 어떤 면이 용감했을까 궁금했다. "나 그냥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는 거다. 용감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는데 그것 자체가 용감한 거라고 했다. 자신들은 한국에 갈 생각도, 만약 간다고 해도 혼자 다닐 용기가 없기 때문에 지금 여기 혼자 있는 내가 용감하다고 치켜세워주었다. 순례길에서 참 큰 위로를 얻었다.



당시에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에 걸었던 순례길은 도피적 성격도 있었다. 솔직하게. 앉아서 스펙을 쌓기 위해 공부하기도 싫었고, 스펙을 쌓는다 한들 지잡대를 다녔던 나에게 남들만큼의 스펙은 메리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례기을 걷고 나만의 생각, 정체성을 정립하게는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핑계로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부터 도망가고자 했다.


다행히도 내가 계획한대로 순례길의 여정에서 많은 생각들이 자랐고, 정리가 됐다. 그 덕에 지원했던 광고회사에 졸업도 전에 취직하는 행운이 있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기 때문에 당시 나의 선택이 옳았다고 하긴 어렵지만 판단이 필요할 때 결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교훈은 확실하게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 그 책임을 위해 여러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도 큰 교육이 되었었다.


내 첫회사의 이름에는 'AIR'라는 단어가 있었다. '빅아이디어는 공중에 있다.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모인 회사'라는 뜻이었다. 끼워맞추기 식이긴 하지만 넓은 세상에서 보고 경험한 수많은 것들 중에 그것을 유의미한 생각으로 정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졸업도 전에 취직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하기 나름인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39. 씨티러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