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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ho Mar 07. 2021

#44. 종묘

101번 글쓰기

면접을 앞두었을 때


2018년 2월 졸업을 앞두었을 때, 나의 가장 시급한 일은 '출근하는 것'이었다. 무작정 되는대로 취업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여차하면 어디든 가야겠다는 안타까운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최선이었던 인하우스 에이전시 TOP5는 공채의 문턱도 높았지만 제일기획을 제외하고 신입공채 공고 자체가 없었다. 그 다음은 크리에이티브로 유명한 독립에이전시들이었는데 대표적인 TBWA를 비롯한 규모가 있는 독립에이전시들도 신입을 뽑는다는 소식은 요원했었다. 그 다음에 광고업계에서는 이름 날리던 디지털 에이전시들이었는데, 사실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박봉에 사람을 도구 취급하다는 관계자들의 이야기가 살벌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입으로 광고업계에 발을 들이기 정말 힘들다고 생각 될 때, 마침 한 곳에서 신입공채를 뽑는다고 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면서 참 암담했었다. 영어성적이 있는 것도, 특출난 특기가 있는 것도, 그렇다고 공모전을 빡세게 해서 입상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럴 때 방법은 흥미 있는 나만의 자료를 만드는 것이 유일할 것이다. 당시 나와 함께 취업을 준비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단어가 렐러번스 였다. 우리 학번이 입학사정관제가 시행된 첫 학번이었고, 세상의 기준도 스펙만큼이나 개인들의 스토리에 주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어떤 스펙을 쌓는지 보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렐러번스 있는 활동들을 했는지가 중요해졌다. 물론 그 말을 믿고 스펙 보다 다른 것을 중시하지는 않았다. 나만 빼고. 어쨌든 나는 AE라는 직무를 하기 위해 내가 했던 자질구래한 것들을 렐러번스라는 키워드에 맞춰 꿰맸고, 신입공채 최종면접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최근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 해보라는 질문을 받았었다.


1월의 종묘
"최근에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진 찍는 취미가 생겼는데, 면접을 앞두고 어떤 질문이 나올지는 모르겠고, 준비한다고 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진기를 챙겨 평소에 가보고 싶던 종묘를 갔습니다. 유명하고 힙한 곳은 시간을 내서라도 가니깐 언제든지 갈 수 있는데, 종묘는 시간 내서도 잘 가지 않게 되니까 이번 참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서 이런 저런 사진을 찍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수를 써도 프레임 안에 종묘가 다 담기지 않는구나. 그러면 이 규모감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사진이 가진 프레임이라는 본질이자 한계점을 넘어서 규모감을 표현해야겠다는 과제가 생겼고, 이것이 어쩌면 사진기라는 제품의 한계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일부로 전체를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종묘의 문틈으로 보이는 처마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사진기 광고를 한다면 '상상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관점에서 사진기를 광고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답변이 장황했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나는 평소에 여러 경험을 하고, 이 경험은 AE로서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위한 끊임없는 시행착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떤 스펙을 쌓느냐 보다 직무적으로 해야할 일을 잘 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위와 같은 답변을 했었다.


그리고 붙었다. 나와 동시에 붙었던 사람은 K대를 나왔던 사람이었다. 아마 안전한 베팅과 과감한 베팅을 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광고업에 첫발을 디뎠고 4년차가 된 올해까지는 하고 있다.


끊어진 목숨들이 모아져 있는 곳을 통해 나의 직업은 숨을 붙여 살아 가고 있다. 신기했고, 여전히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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